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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윤의 해피레터 Sep 13. 2022

열세 번째 레터 : 만날 인연은 만난다  

2022-09-04 발송 레터 



수업 준비를 위해 학원에서 책을 빌리려고 할 때였다. 학원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들을 보다가 한 책에서 시선이 멈췄다. 


‘여기에 이런 책도 있네?’ 


내 시선을 사로잡은 책은 ‘모비 딕’이었다. 문예창작과 교수님께서 작가가 되려면 <모비 딕>은 필수로 읽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셨다. 열변하시는 걸로 그치지 않으시고, 1학년 때 이 책을 읽고 레포트를 쓰라는 과제를 주셨다. 그 수업은 매주 <마담 보바리>나 <적과 흑>같은 고전 소설을 읽고 레포트를 작성하게 했는데, 고역이긴 했으나 나는 1학년의 패기로 어찌어찌 매주 과제를 해나갔다. 


하지만 책 <모비 딕>만큼은 너무 재미가 없어 읽어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이야기의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배 구조 설명이나 고래에 대한 이야기가 100페이지가 넘어갔던 걸로 기억한다. 결국 나는 처음으로 책을 읽지 않고 자료들을 참고하여 과제를 제출했다. 교수님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하신 만큼 양심에 찔렸다. 또한 내가 완독하지 못한 고전 소설이라는 생각에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그런데 그 책을 학원 선생님이 되어 다시 만난 것이다. 그 책을 보자 ‘인연은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손만 뻗어 그 책을 집어 읽는다면 대학교 1학년 때 이어지지 못한 인연이 지금이라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만날 인연은 만난다고 생각하게 된 일이 최근에 두 가지나 있었다. <해윤의 해피레터>를 막 시작할 때였다. 나는 홍보를 위해 해피레터의 공식 로고를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 상태 메시지에 ‘메일 구독 원하시면 갠톡 주세요’라고 입력해뒀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나는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만 보고 과연 누군가 구독 신청을 할까 싶었다. 


그런데 있었다. 그런 분이! 내 프로필 사진만 보고도 해피 레터 구독을 하고 싶다고 S 작가님께서 연락을 주신 거다. S 작가님과 인연을 맺게 된 건 대학생 때였다. 그때 S 작가님은 나와 같은 수업을 들었지만 타과생이셨다. 그때 나는 프로젝트를 위해 S 작가님을 영입했고 작가님은 흔쾌히 우리의 프로젝트에 참여해주셨다. 그렇게 맺은 인연이었지만, 우리가 연락하지 않은 지는 그때 이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를 아예 기억 못하실 법도 한데도 내가 프로필 사진을 바꾸고, 홍보하는 상태 메시지를 띄우자 바로 연락을 주셔서 감동이었다. 심지어 아직 메일 발송 전이었는데도, 기프티콘을 선물해주시며 구독료를 내주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의 sns계정도 맞팔로우도 했다.


sns를 보니 작가님이 여러 작품으로 다양한 책 계약도 하셨다는 반가운 근황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서로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면서 나는 앞으로 우리가 오래 볼 거라는 직감을 받았다. 비록 활발히 연락하지는 못하더라도, 느슨한 빈도로 오래오래 볼 것이라고. 왜냐하면 서로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듣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일도 해피레터를 오픈하면서 생긴 일이다. 해피레터를 오픈하면서 내 첫 방송사의 메인 작가님들께 연락을 드렸다. 내 근황도 전하면서 해피레터를 오픈하게 되었다고 알려드리고 싶었다. 내 팀의 메인 작가님은 망설임 없이 바로 구독을 해주셔서 감동하였다. 응원해주시며 ‘글 쓰는 일이 본업이 될 수 있겠다’라고 말해주신 그 메시지는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다른 메인 작가님께서는 해피레터 링크를 톡을 보내기가 무섭게, 전화가 걸려왔다. 메인 작가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실 거라곤 생각도 못 했기에 허둥지둥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작가님은 다정히 내 안부를 여쭤보셨다. 따스한 목소리를 오랜만에 듣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다른 방송으로 옮겨가셨어도 작가님은 내가 원래 알고 있던 다정한 모습 그대로 계셨다. 그렇게 오래오래 핸드폰 너머로 작가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앞으로 서로 너무 바쁘기 때문에 얼굴 한번 못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볼 인연일 것 같다고. 


그 뒤로 메인 작가님 두 분 모두 해피레터를 매주 읽어주셨다. 누가 메일을 읽었는지 확인하다 보면 꼭 빠지지 않고 작가님들의 이름이 나왔다. 열 편이 넘어가는 메일들의 수신자로 작가님의 이름들을 마주칠 때마다 뭉클해지곤 했다. 메인 작가님들은 정말 바쁘신 분들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이렇게 내 이야기를 꼬박꼬박 챙겨 읽어주실 수 있는지. 


그때 알았다. 내가 자연스럽게 연락하고 그런 내 연락을 받아주는 지인들이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니라고. 나의 바운더리 안에 존재해주는 사람들은 ‘그냥’ 내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시간과 정성을 지불하며 내 옆에 있어주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나는 학원에서 다시 마주친 <모비 딕>을 결국 아직까지도 읽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모비 딕>을 읽을 정도로 높은 레벨인 학생이 없어서’ ‘저학년들을 위한 저레벨 책을 일단 좀 더 많이 읽어야 하니까’라고 이유를 대지만, 사실 다 핑계인 걸 알고 있다. 높은 레벨 책 중에서도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이미 골라서 홀랑 다 읽었다. 


나만 일방적으로 서운함을 느끼게 되는 관계가 있었다. 나는 마음을 많이 쏟고 있는데도, 상대는 그만큼이 아닌 것 같을 때. 내가 놓아버리면 끝나버리는 관계에 공허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관계에는 너무 힘을 빼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모비 딕> 같은 존재였구나...’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연을 이어 나가려면 필수 조건들이 있다. 계속 연락해야 하고, 안부를 물어야 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고... 책 한 권을 읽는데도 그때만큼은 오롯이 그 책에 집중하는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내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세상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들은 <모비 딕> 같은 나에게 시간을 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내 이야기를 들여봐 주는’ 그래서 지금 내 곁에 있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은 그만큼 얼마나 귀한지. 그 마음은 당연하다고 여길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가장 시간을 오래 함께 한 동료 선생님이 최근에 이직하실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 내가 학원에 취업할 때 계셨던 선배 선생님이셨고, 많은 동료가 떠나갈 때 서로의 곁을 지킨 동료 선생님이셨다. 나는 아이들을 지도하다가 어려운 점이 있으면 선배인 선생님께 먼저 해결방안을 구했다. 선생님은 내가 아직 못 읽은 어려운 책들을 읽으시면, 꼭 독서 퀴즈 문제들을 나에게 먼저 공유해주시곤 하셨다. 야간반을 끝내고 함께 밤길을 걸으며 '선생님이 있어 버틴다'라고 서로에게 말하곤 했다. 


내가 선생님과의 이별을 아쉬워하자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기 가서도 책 열심히 읽어서, 해윤쌤께 독서 퀴즈 보내드릴게요.” 


다른 직장에 가서도 책을 읽고 나에게 독서 퀴즈를 공유해주겠다는 말씀을 하시다니. 그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다정한 의지가 있어야 인연이 유지가 되는 것이구나’하고.


‘나만 놓으면 되는 관계’라는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한 명이라도 놓지 않으면 이어지는 관계’라는 뜻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를 놓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을 떠올렸고 그들에게 감사했다. 


한 햇살이가 다음 달에 해외에 한 달 있다가 돌아오기로 했다. 햇살이가 해외로 가기 전 마지막 수업을 할 때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전화번호가 갖고 싶다고. 그때의 나는 내 개인번호를 햇살이에게 주는 게 약간은 부담스러운 상태였다. 하지만 차마 어린 햇살이에게 단호하게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사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집에 갈 때쯤 번호 달라는 거 까먹겠지’라고 말이다. 


내 예상대로 수업을 마치고 햇살이는 집에 간다는 기쁨에 허겁지겁 교실을 나섰다. 그걸 보고 나는 속으로 웃었다. ‘역시 아이들은 잘 까먹는다니까’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교실 문이 다시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교실로 돌아온 햇살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저한테 전화번호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뛰어왔을 게 분명한 상기된 뺨,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서 거칠게 숨을 내뱉는 햇살이를 보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학원에서 나와 집에 가는 길, 얼마나 신이 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을까. 그런데 내 번호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집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오는 마음은 어떤 걸까. 이렇게 온몸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햇살이에게 내 번호를 줬다. 내 번호를 받고 기뻐하며 뛰어가는 햇살이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다정한 의지가 서로 통한다면, 우리는 오래오래 이어져 있을 거라고.

얼마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든 그건 상관없이 말이다.



<글에는 빠진 비하인드>

  햇살이가 내 번호를 가져간 날 이렇게 인사 문자를 보내줬다.

 그 다음 날이 되어서 아침 인사를 문자로 보내준 햇살이. 내가 괜히 우리 제자들을 햇살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자랑하기)



+) 해윤의 해피레터 비하인드

사실 이 날 코로나로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에서 에세이를 보낸 날이었다. 글에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뭔가 스스로 완성도에 아쉬운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피드백을 받고 굉장히 힘과 용기를 얻었다. 나 스스로 아쉽더라도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결국 그 글의 진심은 전해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 글이라는 건 독자들의 상황에 따라 마음에 와닿는 포인트가 가지각색일 것이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글을 써서 보내면 그걸로도 충분할 거라고 믿게 되었다. ㅎㅎ 읽어주는 건, 독자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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