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4 발송 레터
“이 책은 햇살이한테 너무 유치하지 않아요?”
파일을 찾으러 다른 선생님 교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파일을 찾기 위해 책장들을 쭉 보다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내가 담당했다가 교실을 바꾸게 된 햇살이었기에 눈이 갔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그 햇살이가 요즘 무슨 책을 읽나 궁금해졌다. 햇살이의 파일에 함께 꽂혀 있는 책 제목을 보았다. 내가 봤을 때 햇살이의 독해 능력에 비해 그 책은 쉬운 책이었다. 그 순간 내 입이 멋대로 먼저 움직였다.
내 말을 들은 선생님은 ‘그래서 다른 책도 보여주면서 읽고 싶은 책 직접 고르게 하려고 했어요’라고 답하셨다. 찾고 있던 파일을 발견한 나는 괜히 웃으면서 빠르게 교실을 나왔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박해윤, 또 쓸데없는 오지랖 부렸네.’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정말 기뻐하는 사람이다. 도움의 동기는 명백히 선의였기에, 나의 도움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잘하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오지랖’을 부리는 걸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일이 있었다.
독서 논술 수업을 잘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책 읽기’다. 하지만 우리 학원에는 레벨마다 약 100권의 책이 있다. 학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선생님이 그 책을 다 읽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지 않은 채로 코칭지에 의존해서 수업해야 할 때가 생긴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이라서 내용 파악도 어려운데, 독후감을 써야 하는 햇살이도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펜을 놓을 때가 종종 있었다. 처음 수업에 투입될 때 가장 식은땀이 뻘뻘 나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책을 많이 읽었으니 저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어려움은 없다. 그런데 다른 선생님께서 지도한 다른 아이들의 독후감을 보다 보면 선생님의 노고가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 독후감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아 이 책은 이런 질문을 해주면 아이들이 더 잘 쓰는데.’ ‘이 책은 단순한 교훈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뒤집어서 햇살이에게 생각해보게 하면 좋은데...’ 같은 생각들을 하게 됐다.
그뿐 아니라 어떤 책은 내용이 쉬워도 퀴즈가 어렵고(퀴즈가 어려우면 햇살이들이 재시험을 볼 확률이 높아진다), 이 책은 코칭지 안의 프린트 자료를 쓰면 좀 더 좋다는 나만의 정보들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내가 들어올 때는 나를 인수인계 해주실 선생님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몸으로 직접 부딪쳐야 했던 시행착오가 많았다. 내 후임으로 들어오신 선생님들께는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공유 드라이브 링크를 만들어서 책의 정보들을 선생님들과 함께 적으면 어떨까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선생님들이 수업하면서 알게 된 아이들의 책에 대한 반응이나, 책 난이도, 가르칠 때 팁, 동기부여 하는 팁을 공유한다면 선생님들도 수업을 준비하실 때 훨씬 편하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생각만 하고 그렇게 하자고 섣불리 제안하지는 않았다. 이걸 제안하면 원장님은 당연히 반기시겠지만, 그 드라이브 링크를 만들고 내용을 채워야 하는 선생님의 일이 늘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 와서도 나는 그런 공유 드라이브 링크가 있다면 분명 동료 선생님들께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그래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슬며시 고등학교 선생님인 아빠께 말을 꺼냈다.
“그런 수업 자료 드라이브 링크 만들자고 하면 쌤들은 당연히 싫어하시겠지?”
조심스럽게 말한 나의 고민에 아빠는 즉답하셨다.
“당연하지.”
그 반응에 괜히 나는 좀 더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그래도 책에 대한 좋은 팁들을 모아놓은 자료가 있으면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 뒤 아빠가 하신 말씀은 나에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어차피 도움 안 돼.”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가 안 되어서 멍하니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께서 말씀을 이어 나가셨다.
“학교에도 그런 수업 준비 관련한 자료들이 있거든? 공동으로 보는 거. 근데 그거 보면서 수업 준비하는 선생님들 거의 없어. 어차피 그런 자료가 있어도 사람마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나 가치관이 다르거든. 자료에는 A 내용을 가르치라고 적혀 있는 걸 보고 어떤 선생님은 A 내용을 가르치지만, 어떤 선생님은 그 A 부분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생략하고, 추가로 B 부분을 스스로 준비해오시기도 해.”
아빠는 내 눈을 보며 다시 한번 힘주어 말씀하셨다.
“사람마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다 달라.”
“그래서 네가 그런 자료를 만들고, 선생님들도 거기에 내용을 추가해도 결국 다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가르칠걸?”
나는 수업 자료를 만들어놓으면 분명히 ‘도움은 될 것’이라고 한 치의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는 나의 그런 믿음을 완전히 깨트렸다. 나는 아빠의 말씀이 옳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차라리 그런 자료는 네가 그만둘 때 올 후임자를 위해 만드는 게 좋겠다고 충고하셨다. 약간은 허탈한 마음을 가지고 침대에 누웠다. 누운 채로 생각했다.
오지랖이라는 건 ‘내가 옳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행동일지도 모른다고. 그전에는 나는 그래도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남이 아직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서 도움을 주는 건 내가 ‘정답’을 알고 있다고 확신해서가 아닐까. 타인만의 고유한 생각, 그 사람만의 방식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지 못하고.
생각해보면 동료 선생님이 햇살이를 위해 선정해둔 책에 대해 내가 말을 얹은 것도 그렇다. 내가 햇살이에게는 쉽다고 생각한 그 책이, 그 햇살이에게는 “인생 책”이 될 수도 있는 건데! 실제로 내가 너무 재미없게 읽어서 햇살이들에게 추천하지 않은 책이 있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그 책을 스스로 골라 읽어보더니 나한테 “인생 책”이라고 말해줬을 때가 있었다.
나는 이제 학원에서 일한 지 반년이 되어간다. 지금 학원의 선생님 중 두 번째로 오래 일했다. 그래서 후임 선생님들이 수업 준비를 고민하시는 것 같거나, 곤란해하시는 것 같으면 달려가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지금도 들썩들썩한다. 그래도 꾹 참고 조심하려고 한다. 그게 나의 오만에서 나온 행동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오지랖이 세상을 바꾸고 따뜻하게 한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다. 내가 아이들에게 필수로 읽히는 책 중 하나가 <강물이 흘러가도록>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대도시의 물 부족 문제로 저수지가 되어버린 마을의 이야기를 담는다.
‘강물이 흘러가도록’은 뉴잉글랜드의 스위프트 강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대도시 보스턴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면서 스위프트 강 주변의 여러 작은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고향 마을은 물에 잠겼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샐리 제인의 추억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햇살이들에게 읽히곤 꼭 이 질문을 했다.
“만약 햇살이의 마을이 저수지로 만들기로 결정되어서 마을이 다 물에 잠기고, 햇살이가 정든 동네를 떠나야 한다면 마음이 어떨 것 같나요?”
대다수 아이가 책 속 마을 사람들에 이입해 잘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한 햇살이의 대답이 기억난다. 햇살이는 내 질문을 듣고 어렵다는 듯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오래 고민했는데도 결국 자신만의 답을 찾지 못한 듯했다. 햇살이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순진무구한 눈을 하고서 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내가 겪지 않은 일인데 그걸 나에게 왜 물어보지?’라는 생각이 느껴졌다. 햇살이가 책 속의 일이 자신에게는 전혀 일어나지 않을 일일 거라고 믿고 있었기에 수업은 어설프게 마무리되었다. 퇴근하며 햇살이의 대답을 오래 곱씹어보았다. 햇살이의 답이 어느 정도는 정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절대 그 사건을 겪은 당사자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타인이기에. 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고 헤아려볼 뿐 그 사람들이 겪은 슬픔, 절망, 아픔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오지랖이라는 건, 내 일이 아닌데도 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타인의 고통을 마치 나의 것으로 느끼는 그 마음. 그 마음이 있기에 남의 일인데도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는 이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지고, 나은 방향으로 굴러갈 거라고.
언제는 내 친구 단이가 자신의 오지랖이 스스로 피곤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글을 읽으며 내가 알던 단이를 느낄 수 있어서 반가웠다. 단이는 중학교 때 만난 친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이는 한 번도 나랑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다. 우리는 그저 친구의 친구로 만난 관계였다. 단이와 깊게 친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중학교 친구들은 분위기를 띄우고 싶을 땐 내 신체적 약점으로 날 놀리곤 했다. 심한 말은 아니라 화내기에는 애매하고, 하지만 모두가 내 신체적 약점에 한 마디씩 얹으며 웃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 상황 속에서 나는 함께 웃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억지로 웃고 있던 나를 발견해준 게 단이었다. 정작 무리 속 내 친구들은 나를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친구의 친구인 단이가 나에게 먼저 말해준 것이다. ‘너 괜찮냐고.’ ‘지금 이 상황 옳은 거 아니라고.’
단이는 자신의 친구도 아니고, 다른 반 친구의 곤란함을 지나치지 못하는 자신이 스스로 피곤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단이의 말과 행동은 나를 바꾸어놨다. 그 이후로 나는 아이들이 나를 놀릴 때, 기분 나쁘다는 표현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단이가 나에게 해준 말 덕분에 용기가 생긴 것이다.
단이는 자신의 일기에 어머니께서 소풍날마다 얼음물을 꼭 두 개 싸주셨다고 썼다. 만약에 소풍날 물을 가져오지 않은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를 주기 위해서. 그 대목을 읽고 나는 감동을 받았다. 왜냐하면 나는 소풍날 엄마가 물을 싸줬는데도 꼭 깜박 잊고 집에 두고 오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풍날 아이들에게 돌아가며 물을 얻어 마셨던 기억이 있다. 더운 여름날, 아이들이 물병을 내밀며 언짢은 눈빛을 하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눈빛에 나는 목을 간신히 축일 정도만 마시고 갈증을 참아야 했다.
나 같은 아이를 위해 물병을 두 개씩 싼 단이를 어렸을 때부터 만났어야 했는데! 그러면 단이도 물병 하나를 고스란히 들고 오지 않아도 되고, 나도 눈치 보지 않고 시원한 물을 행복하게 마셨을 텐데. 하지만 결국 우리는 만났다. 곤란에 빠진 친구를 외면하지 못하는 성정 그대로 큰 단이는 다른 반인 나를 지나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십 년 넘게 지금도 친구를 하고 있다.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단이의 도움을, 마치 얼음물을 얻어 마시듯이 받으며 지내고 있다. 그리고 나도 종종 단이가 필요할 때 얼음물 같은 시원한 도움을 주는 친구일 거라고 믿는다.
아무튼 이번 글의 결론은 이것이다.
지혜롭게 부려야겠다, 오지랖.
Q.
당신이 받았던 오지랖 중에 불쾌한 오지랖은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오지랖은 무엇인가요?
<해윤의 해피레터> 시즌 2 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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