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0 발송 레터
뿌리염색을 해야 할 때마다 찾아가는 동네 미용실이 있다. 이 미용실은 찾기도 어려운 작은 상가에 들어서서 10년을 우리 동네와 함께했다. 언제 들어가도 늘 손님들로 바글바글하다. 손님 중에 원장님이 초면인 손님이 없고 다 단골들일 정도다.
작은 미용실을 혼자서 운영하시는 원장님은 프로의 느낌이 난다. 합리적인 가격에, 손님들 한 분 한 분을 정성스러우면서 숙련된 손길로 머리를 완성해주신다. 원장님은 늘 블랙 옷만 입으시는데, 그래서 날씬하신 태가 더욱 살아난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에, 샤기컷을 하셨다. 원장님의 헤어 스타일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싶어서 구글링을 하다가 원장님 머리와 정말 비슷한 사진을 발견했다.
저 사진의 헤어스타일에서, 원장님은 꼬랑지라 불리는 뒷목 부분의 머리칼을 추가로 길게 기르셨다. 원장님의 머리만 보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90년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원장님의 두 자녀분들도 미용사를 하신다고 하는데, 원장님의 머리 스타일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어후, 저 꼬랑지 꼴 뵈기 싫어. 엄마가 잠들 때 싹둑 자르던가 해야지.”
원장님은 두 자녀분을 실감 나게 흉내 내신 뒤 호탕하게 웃으셨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자녀분들께서는 정말 미용사시니까 자를 수도 있겠네요.’라고 말하자 원장님은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잘라~! 내가 이 머리가 좋다는데.”
그리고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힘주어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내 스타일이 좋아.”
미용실을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그 말이 계속 떠올랐다. 정말 자기 스타일에 만족하였기에, 자녀들의 지적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여유. 당당하시던 눈빛, 자신감 넘치던 원장님의 포스까지 잊히지 않았다. 원장님의 머리가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정말 잘 어울렸다. 샤기컷은 원장님을 위해서 발명된 것 같아 보일 정도였다. 더 멋진 점은 원장님도 그 머리 스타일이 자신에게 제일 잘 어울린다는 걸 알고 계신다는 점이었다.
나는 남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편이다. 그래서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이라고 해도 유행이 지난 느낌이면 시도하지 못할 것 같다. 작년에 내 취향에 대해 ‘촌스럽다’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뒤 한동안 남의 시선을 더욱 더 의식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입거나, 좋아하는 걸 하는데도 ‘남들은 이걸 비웃으면 어쩌지?’ 혼자서 걱정도 많이 했다.
그랬던 나에게 적절한 타이밍에 찾아온 동화책이 있었다. 바로 우리 학원에서도 읽히는 책인 <줄무늬가 생겼어요>라는 동화책이었다.
이 책에는 친구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주인공 ‘카밀라’가 나온다. 카밀라는 아욱콩을 좋아하는데도 친구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밖에서는 먹지 않았다. 그러자 카밀라는 이상한 줄무늬병에 걸리게 된다. 자신의 몸에 이상한 줄무늬가 생기는 병이었다. 전문가들도 카밀라를 고치지 못하고, 병이 심해진 카밀라는 나중엔 방과 합체까지 하게 된다. 그런 카밀라를 구해준 건 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카밀라에게 아욱콩을 내민다. 아욱콩을 먹게 된 카밀라는 줄무늬가 없는 원래의 카밀라로 돌아온다.
그 뒤로 카밀라는 예전 같지 않았어. 어떤 아이들은 카밀라가 이상해졌다고 그랬지. 하지만 카밀라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어. 카밀라는 자기가 좋아하는 아욱콩을 먹었어. 그 후로는 조금의 줄무늬도 생기지 않았지.
이 동화책의 저자는 독자를 아이로 생각하며 썼겠지만, 어른인 나에게도 책의 메시지가 깊이 와닿았다. 이 동화책을 읽은 뒤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일단 내가 좋으면 그만 아닌가? 그리고 내가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게 뭔지 알아준다면 그게 가장 멋진 일인 것 같다고.
생머리만 유지하던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펌을 하게 되었다.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학원에 갔을 때 내가 마주친 반응들은 각양각색이었다. 날 맨 처음 본 동료 선생님은 ‘해윤쌤의 인생 머리를 찾은 것 같다’며 극찬했다.
그렇다면 햇살이들의 반응은?
대다수의 햇살이들은 내 머리에 대해 딱히 어떤 말도 없었다. 나랑 친한 햇살이들도 내 머리를 흘깃 보곤 ‘선생님 파마하셨네요?’ 이 한 마디만 한 뒤 수업에 집중해서 내가 서운할 정도였다.
하지만 강경 파마 반대파 햇살이들도 있었다. 한 햇살이가 교실에 들어오기 직전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헉’하고 당황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자신이 알던 선생님이 맞는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햇살이는 거의 내 머리에 폭탄이 터져 폭탄 머리가 된 걸 본 것 같은 반응을 했다. 강경 파마 반대파 햇살이들이 몰린 시간대에서는 내 머리가 그 시간 내내 화젯거리였다.
“전 머리가 훨씬 나아요!” “이상해요!” “옛날 사람 같아요!” “할머니 같아요!”
아이들이 돌림노래처럼 내 머리에 대해 외쳐대는 통에 옆 반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제지하셔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강경 파마 반대파 아이들의 시위가 끝난 뒤 수업 시간에는 ‘인생 칭찬’을 받기도 했다. 교실로 들어오던 한 햇살이가 내 머리를 보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그걸 본 나는 아까의 시위로 ‘이 햇살이도 파마 반대파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또 어떤 악의 없는 혹평을 듣게 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쌔앰~!”하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운을 뗐다.
“파마하시니까 디즈니 프린세스 같아요!”
세상에나, 이런 극찬을 받을 수 있다니! 평소 디즈니 광팬에, 디즈니 프린세스 캐릭터들을 다 사랑스러워하는 나는 그 말을 듣고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랐다(...)
‘그래. 이런 극찬을 들을 수 있다면 아까의 혹평들을 들어도 난 괜찮아!^^b’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에겐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날 퇴근을 하며, 하루 동안 내가 마주친 반응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대부분의 햇살이들은 내 머리에 관심이 없었다. 수업 중간중간 ‘쌤 머리 바꿨네요‘, ‘파마했네요?‘ 말을 해준 게 몇 명. 그리고 안 어울린다고 혹평한 햇살이들이 목소리는 컸지만 소수, 그리고 한 햇살이가 내가 평소에 듣고파 했던 최고의 극찬을 해주었다.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반응이 대부분 이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다수, 약간의 관심을 주는 사람이 조금, 혹평하는 사람이 나에겐 크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조금, 같이 좋아해 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럼 앞으로 나는 ‘나를 디즈니 프린세스 같다고 해주는 사람만 끼고 살아야겠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가 퇴근길에 웃어버렸다.
앞으로 나는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마음껏 할거고, 거리낌 없이 말하고 다닐 거다. 누가 ‘○○를 좋아해?’라고 물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환하고 밝은 얼굴로 ’응! 좋아해!’라고 답해주어야지. 나에게 굳이 묻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먼저 여기저기 말하고 다닐 생각도 하고 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는 영감이나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원장님은 그냥 자신의 머리 스타일이 좋다고 말한 것뿐인데도, 나에게 엄청난 용기를 주신 것처럼.
생각해 보면 내가 해피레터를 하게 된 것도 내가 구독하는 다른 이메일 레터가 있어서 가능했다. 이슬아 작가님과 봉현 작가님이 좋아하는 일인 글쓰기를 해서 다행이었다. 그 글을 자신만 읽고 숨겨버린 게 아니라, 여기저기에 올려주셔서 더더욱 다행이었다. 그걸 보며 나도 가볍게 ‘나도 이메일 레터 서비스를 해볼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에세이를 읽고 ‘나도 글을 써볼까?’ 생각하게 된다면 나는 정말 기쁠 것이다.
그뿐 아니라 sns에 지인이 좋아하는 작품을 꾸준히 외쳐주셔서 나도 ‘봐볼까?’ 생각했다가 인생 작품을 만난 일도 있었다. 내가 학원 선생님이 된 뒤 운동을 해야겠다 마음을 먹은 후, 어떤 운동을 할까 고민했을 때 필라테스에 마음이 기울은 것은 필라테스를 즐겁게 하고 있다고 말해준 많은 지인들 덕분이었다.
사람들마다 좋아하는 게 다양할 거다.
누군가는 시를 쓰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소설을 쓰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에세이 쓰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걷기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달리기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혼자서 하는 아침 산책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반려견과 함께하는 밤 산책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주말 오전에 운동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퇴근 후 운동을 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다이빙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스쿼시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헬스 가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필라테스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드라마 정주행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학습 만화를 보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웹소설을 한꺼번에 결제해서 읽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모델링 작업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베이킹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뮤지컬을 보러 가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네일아트를 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맛집 탐방을 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사진에 찍히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헤드셋으로 음악 듣기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덕질하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술 약속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카페 가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SF 소설 소모임 가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드라이브가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여행가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인스타에 일상을 올리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블로그에 사색 가득한 글쓰기를 좋아하고...
내 지인들이 좋아하는 걸 하나씩 써 봤는데 이렇게나 좋아하는 것들이 다채롭다. 저렇게 다양한 ‘좋아하는 것들’ 중에서는 내가 아직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인들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걸 숨기지 않고 계속해서 외쳐주면 좋겠다. ‘아,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너무 좋아해!’하고 말이다.
나는 글쓰기를 아아주 좋아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 레터를 작성하며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이 레터를 발송해야 하는 이번 주말에 토,일 약속이 연달아 잡혀 있었다. 해피레터를 쓸 시간이 없는 게 걱정되었다. 그래서 8시 금요일 밤 퇴근하는 동료 선생님들을 배웅한 뒤, 아무도 없는 학원에 혼자 남았다. 거기서 2시간 정도 글을 쓰느라 늦게 퇴근하는 나 스스로를 보며 되새김했다. 나는 글쓰기를 이 정도로 좋아하는구나.
아홉 번째 레터 1차 초안 작성을 끝내고, 그날 퇴근하는 발걸음이 한껏 신이 났다. 이제 출발하면 집에는 밤 11시에 도착할 걸 아는데도 그랬다. 잔뜩 신바람이 난 채로 달님과 함께 퇴근하며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가야지
줄무늬 뒤에 숨지 말고 원래의 나로
Q.
남들이 알아줄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요?
+) 글에는 빠졌지만 꼭 넣고 싶은 에피소드
한 햇살이는 내 머리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파마하니까 그거 닮았어요. 그 있잖아요.. 해리포터에 나오는 론 위즐리의...”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헉 설마 론 위즐리의 여자친구, 헤르미온느?’라고 생각했다.
“엄마, 몰리요.”
이 말을 들은 뒤로부터는, 출근을 할 때나, 양치를 할 때나, 잠이 들기 직전에도 저 말이 떠오르면 ‘몰리 ㅋㅋㅋㅠㅠ 몰맄ㅋㅋㅋ’ 끅끅대며 웃곤 한다. 이렇게 날 예상치 못하게 웃게 해주는 햇살이들이다..^^
+) 해윤의 해피레터 비하인드 09
내 친구는 날 헤르미온느로 봐줬다고 하니 됐다^^♥ 누군가는 내 머리를 보고 몰리라 볼 것이고, 누군가는 헤르미온느로 볼 것이다. 그러니 역시 헤르미온느로 봐주는 사람을 내 곁에 두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ㅇㅂ<
매주 일요일 밤 9시 <해윤의 해피레터>가 발송됩니다. 구독 신청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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