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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윤의 해피레터 Jul 10. 2022

일곱 번째 레터 : 인간의 정체성

2022-06-26 발송 레터


오늘 글이 제목이 사뭇 진지해 보이지만, 어쩌면 그동안의 레터 중에 가장 가벼운 글일지도 모른다. 그저 평상시 많이 했던 생각을 글로 풀어내려고 한다. 일명 ‘사람은 ○○할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깨달음 모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사람은 실수하는 존재다.


우리 아빠는 나 때문에 이제 어지간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으신다. ‘아빠 ○○를 잃어버렸어!’ ‘아빠 ○○를 하는 걸 깜빡했어!’라고 말해도 으이구~ 한 마디 내뱉으실 뿐이다. 해윤의 해피레터를 할 때도 첫 레터에서 피드백 보내는 란에 링크를 따로 첨부하지 않았다. 그 실수를 나중에 알아챘는데, 나를 잘 아는 내 지인들은 놀라지 않고 ‘음~ 역시 해윤이야! 해윤이다워!’라고 생각했을 것만 같다.


첫 레터에 피드백 링크를 첨부하지 않은 나..

나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자주자주 깜빡하고 곧잘 잃어버리는 아이였다. 내가 처음으로 학교에서 서예를 배운다고 했을 때였다. 부모님은 비싼 서예 세트를 사주셨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걸 잃어버렸다. 그것도 첫날에, 수업 때 한 번도 써보지도 못하고 말이다.


첫 서예 수업이 있던 날, 나는 서예 세트 준비물을 들고 신나게 학교에 가다가 중간에 문방구에 들렸다. 그 문방구에서 새로 산 물건만 들고 서예 세트를 두고 왔다. 그렇게 잃어버린 서예 세트는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이런 덜렁대는 성향은 지금도 여전해서 카드를 단말기에 꽂은 채로 그대로 가려고 하거나, 카페에서 우산이나 지갑, 핸드폰을 두고 가는 일은 일상이다.



방송작가 일을 할 때는 실수 모음 메모장을 만들어야 했다. 일하면서 실수를 너무 많이 했다. 다시는 그걸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기록을 해뒀다. 1번부터 시작된 이 실수 모음 메모장은 무려 25번까지 있다!(방송작가 일을 그만두고 나서야 업데이트를 멈출 수 있었다.) 방송작가 말미에는 나 스스로 성인 ADHD를 의심했다. ADHD를 계속 검색해보고, 검사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행히 이직한 뒤로는 그래도 ADHD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생각 중이다.


논술학원 선생님으로 일하는 지금도 크고 작은 터무니없는 실수들을 많이 한다. 시간표를 잘못 봐서 아이가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지각했다고 부모님께 연락을 드린다거나, 상담을 받으러 오신 학부모님이 아직 결제하지 않으셨는데 시스템 이용료가 나가는 계정을 내가 미리 만들어버렸다거나, 학부모님 핸드폰 번호를 잘못 입력해서 그동안 아이의 데이터가 발송되지 않았다거나 그런...


나는 그동안 나 스스로를 많이 자책하는 괴로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한 동기 언니가 올려준 블로그 글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언니는 일기로 직장 생활을 하다 스스로 이해가 안 되는 실수를 할 때가 있다고 썼다. 그 언니는 나와는 달리 차분하고 일을 꼼꼼히 하는 성격이라 내가 동경하는 언니였다. ‘그런 언니도 실수를 하는구나...’ 생각하며 이런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인간이라면 실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사람이라서 실수하는 거라고. 이런 생각을 한 뒤부터는 나 스스로에게 조금 너그러워지게 되었다.



2. 사람은 쉬어야 한다.


이 신념을 나는 논술 선생님을 하며 완전히 확신하고 신봉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가르치는 일을 정말 즐거워하는데도 주말이 되면 진심으로 행복해진다. ‘박해윤 선생님’이라는 정체성으로 주 7일을 일해야 한다면 나는 아이들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주말이 되면 박해윤 선생님이라는 정체성은 집어던지고, ‘친구 박해윤’ ‘글 쓰는 박해윤’이라는 정체성으로 살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


내가 믿는 ‘신’조차도 천지 창조를 하실 때 할 일을 다 마치시고 마지막 날은 쉬셨다. 만약 그 분이 마지막 날까지도 일하시며 그야말로 ‘갓(god)-생’을 사셨다고 하셨으면 난 굉장히 심리적 거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AI 분야 전공의 언니들과 놀기로 한 날이었다. 약속날 언니 둘은 옷과 어울리지 않는 큰 가방을 메고 왔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냐고 물으니 노트북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으면서 농담으로 ‘왜? 코딩해야 해?’라고 물어봤다.


그러니 진짜로 그렇다고 했다... 약속 끝나면 자기들 코딩하러 가야 하니, 9시엔 모임을 파하자고 양해를 구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정말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언니들이 장난을-이과식 드립이라고나 할까- 치는 줄만 알았다. 나도 방송작가를 할 때는 약속에 나가서도 노트북을 들고 다닌 적은 있었다. 그래도 약속 날 정말 그 들고 온 노트북으로 작업을 한 적은 없었다. 노트북은 그저 대비로 들고 다닌 거였다. 언니들도 그런 거겠지 라고 생각해서 재차 물었는데 언니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약속 날은 일요일이었고, 우리는 무려 술 마시러 가자고 갈 장소까지 정해놓은 상태였는데 말이다!


우리들은 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술에 취한 언니들은 결국 9시 막바지에 코딩 스터디를 당일 취소했다. 그걸 보며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일하는 정체성 말고도, 진짜 나의 정체성으로 사는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일요일 밤, 언니들은 내가 잘 모르는 ‘코딩하는 여자들’에서, 스터디를 취소하고 나서야 내가 아는 ‘친근한 언니들’로 돌아왔다. 그날 우리는 막차가 끊기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3. 사람은 사랑을 해야만 하는 존재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책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폭력처럼 위험한 부작용을 낳지 않고도
영향을 미치며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이 글귀를 읽었을 때 완전히 공감했다. 나는 작년 연애를 하며 다이어트를 해서 5kg 이상을 뺐다. 맹세하건데, 나 스스로 자기만족을 위해서 다이어트를 했다면 절대로 그렇게 빼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했던 운동이나 식단을 생각하면 ‘정말 어떻게 했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때는 힘든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오히려 빨리 살이 빠진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열심이었던 기억이 난다.


참 짧은 연애를 했는데도 상대에게 고마운 점이 있다면, 나에게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어준 것이다. 상대는 운동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운동의 장점을 많이 알려주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자신은 운동을 루틴으로 만든 뒤에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크게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와서도 체력이 남아도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서였다. 내가 학원 선생님의 첫 월급을 타자마자 운동을 끊은 것은. 선생님으로 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오후 수업이 되자 체력이 고갈되어버렸다. 그때 어떤 햇살이가 도움을 요청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 정도는 스스로 좀 해 봐.’라고 짜증을 내버리고 말았다. 짜증을 내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는 선생님인 나에게 당연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건데.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체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 덕분이었다.


매 끼니마다 단백질을 신경 써서 챙겨 먹고, 지하철에서 계단이 있으면 직접 걸어 올라간다, 집 도착하기 전에 지하철 한 정거장에서 미리 내려 걸어간다. 이 습관들은 다이어트를 하며 만든 것이고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운동을 시작한 지 4개월이 되어가는데, 인바디 결과에서 내장지뱡 레벨은 줄고, 골격근량이 조금이긴 하지만 늘었다는 결과를 받았다.


이런 일을 경험한 뒤로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사랑에 빠져서 개과천선을 했다거나, 더 발전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수석이 되었다거나 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 새삼 느낄 수밖에 없는 거다. 사랑이라는 건 얼마나 부작용 없이, 한 사람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넓히는지.


사랑은 나의 세게를 넓혀, 결국 '너'를 이해하게 한다. 학원에서 아이가 짓궂은 말을 하며 투정을 부릴 때가 있다. 그 아이를 자세히 살펴보며, ‘아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했다. 아이를 가만 보다가 한 답을 찾았다. 아이가 가장 원하는 건 내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니라고. 나는 그 아이가 진짜로 원하는 걸 주기로 했다. 아이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준 뒤 안아주었다. 내 품에 쏙 안긴 아이는 순한 양이 되어버렸다.


나는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아 뉴스 기사를 자주 보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혐오 가득한 댓글들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원래는 그런 댓글들을 읽으면 화부터 났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댓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다.


‘이 사람이 진짜 원하는 게 혐오를 하는 건가?’


‘이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게 뭘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댓글을 다시 읽으니, 내가 읽지 못했던 어떤 속마음이 읽혔다.


‘이 사람.. 결국 사랑을 하고 싶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보니 혐오로 점철되어있는 댓글의 내용이 해체되면서, 남아버린 한 진심이 읽혔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바람. 이런 생각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한 특정 커뮤니티를 분석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좋은(’김치녀‘가 아닌) ‘여자친구’를 만나 ‘서울’에 자리 잡고 ‘가족’을 이루는 꿈. 인터뷰를 한 일베 이용자들 대부분이 바라는 미래상이었다. 인터넷에서는 극단적인 여성 혐오를 쏟아내고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는 폭식투쟁을 하던 그 일베가 맞나 싶은 평범함. 김학준은 논문에서 ‘평범함이 유토피아가 되는 시대’라는 표현을 썼다.”


-시사인 : 이제 국가 앞에 당당히 선 ‘일베의 청년들’-


이 기사를 읽고 ‘내가 읽은 댓글의 진심이 거짓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나이브한 지점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특정 커뮤니티를 옹호하려는 의도도 절대로 아니다. 그저 내가 믿는 바를 적자면, 사람은 사랑이 얼마나 고픈 존재인가.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사람은 사랑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랑은 절대로 연인간의 사랑만 말하는 게 아니다.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나는 스터디 카페에서 가까운 초밥 식당을 알게 되었다. 나 혼자 먹기엔 아까운 곳이었다. 맛있는 초밥을 먹으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우리 동생들. 나는 혼자 밥을 먹으며, 내가 만약 취업한다면 우리 동생들을 여기로 데려오리라 마음을 먹었다.


취업에 성공해서 월급을 타자마자 우리 동생들을 초밥집에 데려갔다. 우리 동생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너무 고맙다고 예쁜 말만 쏟아내는 동생들과 밤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존재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돈을 버는 일이 힘들지 않다고. 마찬가지로 월요일이 되어, 학원 출근을 하게 되어도 몸이 피로하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우리 아이들을 곧 만날 거니까. 특정 요일이 되면 얼굴이 동동 떠오르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곳에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금요일 날 행복하게 출근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바로 우리 동료 선생님들 간식을 사는 거다. ‘금요일이니까 우리 조금만 더 힘내요’라고 말하며 간식을 건네드릴 상상을 하면 나도 모르게 학원으로 가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간식들을 사서 선생님들을 나눠드리면, 선생님들 모두 감사하다며 웃어주신다. 그러면 나도 덩달아 같이 웃으며 행복해진다. 저번 주에는 다른 선생님이 마이쮸를 사서 나눠주셔서 또 행복해졌다.


선생님들 명수대로 산 간식을 가방에 넣고 씩씩하게 출근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내가 애정하는 동료 선생님들이 있는 곳으로.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는 출근길, 오늘도 어김없이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도 사랑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오늘의 질문은 세 개,


1. 기억에 남는 실수가 있나요?

2. 나는 어떤 휴식을 취하는 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3. 나는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나요?




+) 해윤의 해피레터 비하인드 

같이 읽고 싶은 피드백을 매번 레터마다 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엄청 감동을 받은 또 다른 피드백...ㅠㅠ 우리에게 뭔가를 나눠주는 게 행복한 일이고 이런 사랑을 하고 있다니.. 내가 이런 친구를 뒀다니...ㅠㅠ 내 인복은 정말 엄청나다..♥



매주 일요일 밤 9시 <해윤의 해피레터>가 발송됩니다. 구독 신청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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