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윤의 해피레터 Jul 02. 2022

여섯 번째 레터 : *학년이 기초 레벨해도 되나요?

2022-06-19 발송 레터 


“선생님 얘는 왜 *(대략 높은 숫자)학년인데, *(대략 낮은 숫자)레벨 책 읽어요?” 


수업하다 보면 아이들에게서 이런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아이들은 의외로 다른 아이의 레벨에 관심이 많다. 특히 자기 옆에 나이 많은 친구가 앉으면 꼭 몇 레벨 책을 읽는지 힐끔 쳐다본다. 그 친구가 낮은 레벨을 읽고 있다 하면 저 질문을 한다. 처음에 이 질문을 들었을 땐 허둥대며 대답을 잘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능숙하게 이렇게 답한다. 


“햇살아, 만약에 거북이, 토끼, 다람쥐가 땅에서 달리기 시합을 해요. 누가 제일 빠르죠?”

“토끼요.”

“그 세 동물들을 이번엔 나무타기를 시켜봅시다. 누가 제일 빠르죠?”

“다람쥐요.”

“만약 그 세 동물들을 물속에 빠트리면?”

“거북이요.” 


여기까지 대답했을 때 대부분의 햇살이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런 햇살이를 향해 웃으며 이렇게 말해준다.


“이 세 동물들이 각자 빠른 장소가 다른 것처럼, 책 읽기 레벨도 마찬가지에요. 여기 햇살이는 책 읽기 레벨이 *(낮은 숫자)레벨이지만, 수영을 잘해요. 저기 햇살이는 책 읽기 레벨이 *(높은 숫자)레벨이지만 체육은 정말 싫어한다 했었고요. 그렇죠?” 


여기까지 말을 하면 아이들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더 이상 레벨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자신의 레벨에 맞는 책을 열심히 읽는 햇살이들의 뒤통수를 보다 보면, 슬그머니 떠오르는 한 아이가 있다. 똑 떨어지는 바가지 머리를 하고서 느긋한 눈빛을 한 모습이, 묘하게 거북이 캐릭터를 연상케 하는 우리 햇살이. 사실 나도 그 전엔 아이들의 레벨에 대해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고학년인 햇살이가 낮은 레벨이면 나도 모르게 조바심이 났다. 그런 나의 생각을 바꿔준 햇살이가 있었다.


햇살이는 이 거북이 캐릭터를 닮았다.책 속 거북이는 ‘슈퍼 거북’의 칭호를 지키려했다가 번아웃을 겪게 된다.


오늘의 레터는 그 햇살이가 주인공이다.


햇살이가 우리 학원에 처음 왔을 때는 테스트 결과에 따라 기초책을 읽었다. 기초책은 1레벨의 전 단계다. 주로 올해 1학년이 된 친구들에게 읽히는 책이다. 기초책이기 때문에 독서 퀴즈 문제가 적고, 독서 감상문 활동도 없다. 수업 준비를 할 때 햇살이의 자리에 기초책들을 갖다 놓으며 나는 이런저런 걱정을 했다. 


‘햇살이는 *학년인데, 기초책을 읽어도 될까?’ 


우리 학원에서는 햇살이가 어떤 책을 읽는지 하루에 책 권수마다 보호자님들께 데이터가 발송된다. 나는 보호자님께서 햇살이는 *학년인데 기초 책을 읽으신다는 것에 기분 나빠하신다거나, 조급해하시진 않을지 속으로 괜히 걱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햇살이는 느긋한 얼굴로 기초책들을 하루에 세 네권씩 즐겁게 읽다 갔다.

 

햇살이는 교실에서 목소리를 나에게 제대로 들려준 적이 없었다. 햇살이는 할 말이 있으면 먼저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툭툭 쳤다. 내 귀를 햇살이의 입에 가까이 대준 다음에야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것도 주로 다 단답이었다. “목 말라요.“ ”다했어요.“ 같은. 나는 그저 햇살이는 조용히 말하고 싶어하는 아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 날, 햇살이가 자기도 1레벨 책을 읽고 싶다고 먼저 말해주었다. 교실에서 1레벨 책을 읽는 친구들을 보고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첫 연습 수업을 했을 때는 글쓰기를 너무 싫어하는 햇살이었는데, 이번에는 1레벨 책의 독서감상문을 스스로 잘 썼다. 너무 기뻤던 나는 그날 당장 보호자님께 보낼 피드백을 작성했다. 햇살이가 먼저 써준 독서 감상문 사진도 같이 보내드렸다. 그리고 어머님께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받았다. 


햇살이가 학원을 한 달만에 적응한 건 처음이라고. 다른 학원에서는 선생님하고 대화하기까지도 반년이 넘게 걸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상상을 해봤다. 만약 내가 햇살이에게 ‘나이’를 운운하며 레벨업을 닦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햇살이는 마음의 문을 꽉 닫지 않았을까. 어쩌면 학원을 결국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나이는 나이일 뿐, 햇살이에게는 ‘기초책’이 일단은 맞는 레벨이었던 것이다. *학년이 기초 레벨을 읽고 있다니, 어른들의 눈엔 답답하고 걱정이 될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어른의 시선으로 평가한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속도로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한 달을 기다려주니 햇살이가 먼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가. 1레벨 책을 읽고 싶다고.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지도하던 햇살이 중에 책을 읽으면 알아서 글을 척척 쓰는 다른 햇살이가 있었다. 나는 당연히 이 햇살이는 원래부터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잘 하는 아이인 줄 알았다. 그러다 그 햇살이의 작년 글을 모아둔 포트폴리오를 최종 검수를 하게 되었다.


그 포트폴리오를 읽고 깜짝 놀랐다. 작년의 햇살이는 단답형이나, 한 문장만 쓰고 더 쓰지 못했던 날들이 많았다. 심지어 책의 핵심 주제와 완전히 반대되는 엉뚱한 답변을 쓴 적도 많았다. 생각도 못한 엉뚱한 글을 읽고, 빈 교실에서 나 혼자 키득대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햇살이는 책의 내용에서 핵심 주제도 잘 찾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잘 써준다. 햇살이는 ‘그냥’ 잘 한 게 아니었다. 1년 동안 착실히 자라왔던 거였다. 포트폴리오 검수를 마치고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햇살이가 글을 쓰고 싶었던 날보다 글을 쓰기 싫었던 날이 많았겠지. 전 담당 선생님은 오늘 수업은 실패했다고 생각한 날도 있었을 거야. 햇살이가 너무 짧게 써주거나, 핵심을 완전히 잘못 파악해서 써준 날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결국 햇살이는 성장했다. 자신만의 속도로. 그 포트폴리오를 보고 알았다. 


성장은 ‘느긋하게’, 하지만 ‘분명히’ 찾아온다고.

그러니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쫓기듯이 성장을 재촉하고 강요하진 말자고.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라고 레벨에 안 시달리나 싶다.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취업 레벨에 들어가야지!’ ‘네 주변 나잇대를 봐! 다들 취업 레벨에 들어갔잖아.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결혼 레벨에 들어가야 해!’ 사회는 우리에게 획일적인 레벨에 따르라고 압박을 가하곤 한다. 


그런데 내가 우리 교실의 아이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이들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다. 같은 연도에 태어났다는 것 빼고는, 너무나 일관성 없이 다 달라서 놀랄 정도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 똑같은 레벨을 하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런 것처럼 우리도 사회가 요구하는 레벨에 꼭 목메듯이 따라야 할까 생각도 든다. 다들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가고 있을 텐데. 


이러면서도 나는 가끔 수업을 지도하면서 조급해지곤 한다. ‘오늘 트레이닝만 하고 가면 안 되는데! 책 반 권이라도 읽히고 하원시켜야 하는데!’ ‘오늘 독서 감상문까지는 끝내게 지도를 했어야 했는데...’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처음 한달 간 기초책을 행복하게 읽었던 햇살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짧은 글에, 엉뚱한 내용이 많았던 햇살이의 포트폴리오도 함께. 그러면 좀 마음이 느긋해진다. 


오늘의 레터 주인공인 햇살이는 지금은 교실에서 우렁차게 나를 부르곤 한다. 내 귀를 입가에 대줘야만 말하던 그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갓 말이 튼 아기를 보는 것처럼 신기하다.


어느 날, 햇살이가 우리 학원을 나설 때 유독 들떠 보여서 물어봤다. 햇살이는 이제 어디 가냐고. 햇살이가 이젠 다음으로 미술학원을 가게 되어서 신난다고 말해줬다. 독서 감상문 활동을 할 때 책 속 장면을 행복하게 그렸던 햇살이의 모습이 생각났다. 보호자님께서 햇살이가 글쓰기는 약해도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해주신 말도 떠올랐다. 


1레벨 책을 재밌게 읽고 가는 뒷모습을 배웅하며 나는 어떤 이미지를 상상했다. 육지를 걷던 거북이가 이제 물로 나가 빠르게 헤엄치는 이미지를. 독서 논술 학원에서 느릿하게 걸었던 햇살이가 이제는 미술학원에서는 빠르게 헤엄을 칠 때다.


‘오늘도 자신만의 속도로 걷느라 수고했어.’


나는 속으로 햇살이에게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든다. 느릿하지만 분명히 변화할 햇살이의 다음날을 기대하며. 언젠가 내가 직접 햇살이의 포트폴리오를 만들며 ‘그래, 이런 날도 있었지’ 웃을 날을 꿈꾸며.


우리 모두 자신만의 레벨업을 하려 하루하루 살고 있다. 그런데 어떤 날은 '오늘 하루는 엉망었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날도 있을 거다. 시간을 낭비했다고 죄책감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상상을 하면 좋겠다. 오늘은 1년 치의 내 포트폴리오에, 미래의 내가 피식 웃게 할 한 장을 완성한 것뿐이라고.



Q.

내가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다고 느낄 때는

주로 어떨 때였나요?






매주 일요일 밤 9시 <해윤의 해피레터>가 발송됩니다. 구독 신청은 여기에~!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6216


이전 05화 다섯 번째 레터 : 와 아직 새파랗게 젊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