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X한식문화: 우리家한식-한식문화 이야기 공모전
외할머니의 무말랭이는 빨간색이 아니었다. 고추장과 고춧가루로 양념한 새빨간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게 썰어 몇 번을 말렸다 불렸다를 반복한 무는 새끼손톱 길이로 아주 얇았다. 흡사 한 뭉치의 구더기 같아 보였다. 간장과 참기름으로 양념한 무말랭이는 허여멀건한 옅은 갈색이었다.
이 이북식 무말랭이를 숟가락으로 한가득 떠서 입에 넣고 우물우물거리면 씹는 맛이 독특했다. 꼬들 거리면서도 눅눅하고 물렁하면서도 아삭했다. 무 특유의 짭조름하고 알싸한 맛이 몇 배로 압축돼 강한 맛이 났으나 이내 참기름과 간장이 스며 코까지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나는 외할머니네서 무말랭이를 먹을 때면 반찬이 아니라 밥처럼 먹었다. 외할머니는 무말랭이 맛을 안다며 나를 예쁘다 했다. 밥은 그대로 두고, 원형 사기 반찬통의 반 정도 쌓인 새로 무친 무말랭이만 긁어먹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그럴 때면 밥상머리에 같이 있던 이모들은 이내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 어렸을 때는 맛도 없는 무말랭이 귀하다면서 젓가락으로 집어먹어도 아껴먹으라고 뭐라 하더니만..." 나는 이모들이 푸념할수록 더 얼마 없는 무말랭이를 한 술 가득 퍼 먹었다. "얘는 눈치도 없이"라며 둘째 이모가 내 머리에 꿀밤을 꽁하고 쥐어박을 때까지. 보란 듯이 더 과하게 무말랭이를 밥보다도 많이 먹어댔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평범한 밥반찬은 아니었다. 외할머니와 한집에 같이 살던 다섯째, 막내 이모는 "저놈에 무말랭이 만들면서 죽겠다 거리고 지겨운 옛날 얘기하다 운다"며 푸념했다.
오래된 아파트 꼭대기 15층 외할머니 댁엔 햇살 드는 마룻바닥에 깔린 신문지 위로 잘게 썰린 무들이 늘 말라가고 있었다. 무를 써느라 손목이 시큰거려서 혼났다는 말을 외할머니는 몇 번을 반복했다. 그때만 해도 무는 댕강댕강 쉽게 썰어내는 건 줄 알아서 할머니가 엄살 핀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를 처음으로 썰어본 건 중학생이 됐을 무렵이다. 라면이나 볶음밥 등 간단한 요리들을 한 두 개 정도 할 줄 알았던 터라 양파, 감자, 당근 등을 썰어봤더랬다. 매 해 깍두기를 담그던 엄마가 처음으로 손목이 아파 더 이상 무를 못 썰겠다고 했을 때였다. 나는 다른 야채 썰듯 서걱서걱 대충 칼질하면 되겠지 생각하며 호기롭게 무를 썰어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아직 무는 못 썰 거라며, 손 다친다며 한사코 말렸다. 그러다 결국 손가락 마디까지 아프다며 나에게 칼과 무를 넘겼다.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무는 다른 야채와 달랐다. 마치 돌덩이를 써는 것 같았다. 지름은 왜 그렇게 큰지. 허벅다리통만한 무는 빈틈이 없나 싶게 칼날이 들어가지 않아 반으로 쪼개기도 힘들었다. 둥근 원통 모양 무의 네 귀퉁이를 잘라 직육면체로 만들고, 그 사각 면을 다시 썰고 썰었다. 결국 무의 3분의 1토막도 못 자르고 식칼을 놓았다. 손잡이와 칼등을 양 손으로 잡고 온 몸의 무게를 실어 내리눌러도 무는 썰리지 않았다. 조금의 요령도 없이 정직한 손목과 손가락의 힘이 정확하게 들어갈 때만 무가 썰려나갔다. 이렇게 힘든걸 그냥 사 먹으면 편할 텐데. 내 손으로 만들어 내 새끼에게 먹이겠다는 집념이 있어야만 끝까지 썰 수 있는 게 무였다. 이 바위 같은 무를 구더기 크기까지 고르게 잘라내며 외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할머니는 왜 무를 썰다 울었을까.
외할머니는 응석받이와 생활력 강한 가장의 모습 모두를 지녔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보다 더한 양면성을 가진 할머니의 감정 기복은 나이가 들수록 심해졌다. 즐겁게 여행을 가는 길에서, 가족들이 오랫동안 준비해 큰 결심하고 간 고급 레스토랑에서 맥락 없이 엉엉 소리 내 울며 옛날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넉넉한 시댁과 친정 덕에 걱정 없이 낳아 키우던 큰딸을 등에 업고 전쟁통에 맨발로 강을 건너고 시체산을 넘어 영문 없이 남한에 오던 그 날이 자꾸 떠오른다며.
샌님 같은 외할아버지는 북한에서 대규모로 목재사업을 하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공부만 잘하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외할아버지가 남한에 오니 생활력 없는 샌님일 뿐이었다. 사업을 해보자던 동료에게 큰 사기를 당한 후 외할아버지는 사회로 나가질 못했다. 손 벌릴 곳도 없는데 다섯 딸은 무럭무럭 자라며 점점 더 돈이 필요해졌다. 도도한 깍쟁이였다는 외할머니는 어느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속내를 친구들에게 비치지 않던 자존심 강한 그녀였는데. 친구들에게 화장품과 밀수입한 외국 과자들을 팔기 시작한 거다. 다섯 딸을 공부시키고 먹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할머니는 화장품이 가득 들은 보따리를 들고 남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30대와 40대를 억척스럽게 돈벌이에 바쳤다.
외할머니의 팔십 몇 해 생신날. 당신이 낳은 다섯 딸과 사위들 그리고 손주, 손녀가 한자리에 모였다. 손주들의 장기자랑이 끝나고 흥이 오른 사위들이 할머니에게 같이 춤을 추자며 손을 잡고 나와 노래를 권했다. 할머니는 노래와 춤을 한사코 거절했다. 할머니는 북에 두고 온 어머니가 생각나 춤추고 노래할 수 없다고 말했다. 흥겨운 생일잔치상은 별안간 터진 할머니의 눈물로 싸해졌다.
외할머니는 6남매의 막내딸이었다. 평양 부잣집의 막둥이는 1923년에 태어나 온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컸다. 유복한 집의 막내가 으레 그렇듯 걱정 없이 자라며 노래하고 춤추는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북한 무용수 최승희가 어린 외할머니의 춤사위를 보고 할머니가 결혼한 후에도 다시 찾아와 춤꾼이 돼보지 않겠느냐고 했단다. 이 대단한 제안은 가지 못한 길이 아니라 막혀버린 길이 됐다. 피할 길 없던 6.25 전쟁이 재능 많은 소녀의 인생을 영원히 비틀어버린 것이다. 외증조할머니는 막내딸을 살리려 "북에서 중공군과 빨갱이들이 쏟아져 내려오니 먼저 남으로 가있으라"며 단호하게 외할머니의 등을 떠밀었다고 한다. 등에 큰 이모를 업은 외할머니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신발이 닳아 없어질 만큼 걷고 또 걸었다. 등 뒤에서 총소리가 나고 옆에 걷던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질 땐, 하루빨리 남한에 도착해 엄마에게 위치를 알리겠다는 생각만 하며 찢어진 맨발로 암흑 속을 가르며 아이를 안고 죽도록 뛰었다.
이게 끝이었다. 한반도를 반으로 가른 선이 남과 북에 수억 개의 이별을 만들었다. 곧 따라 내려오겠다고 했던 외할머니의 엄마는 38도 선을 넘지 못했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그리울 때면 이를 앙 물고 굳이 힘든 과정을 거쳐 무말랭이를 만들었다. 외할머니의 엄마, 나의 증조할머니는 커다란 한옥집주인 마님이었다. 장작 패는 하인, 요리하는 하인이 있었지만 무말랭이만은 직접 만드셨다고 한다. 사랑하는 막내딸인 우리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짭조름한 이북식 간장 무말랭이만은 당신 손으로 지어 먹이셨다.
칼날이 안 들어갈 만큼 단단한 무를 천천히 썰고 또 썰어 겹치는 부분 없이 판판하게 잘 펴서 햇볕에 말리고, 다시 물에 헹구고 또 말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외증조할머니는 외할머니를 품에 안고 쓰다듬으며 노래하셨다. 무의 물기가 햇볕과 바람에 날아가며 내는 달큼한 냄새를 맡을 때면 외할머니는 엄마품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을까.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못 쉴 만큼 힘든 날에도 외할머니는 기댈 곳이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물건을 좀 사달라고 하도 많이 부탁해서 보통의 친구에게 하듯 힘들다고 하소연할 수 없었다. 생활력 없는 남편도 매일 학비가 없다, 기성회비가 없다 징징대는 다섯 딸도 모두 외할머니에게 기대 살아가는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밤새 무말랭이를 만드셨다.
커다란 무 하나를 손목이 시리도록 다 썰어도 말리고 나면 한 줌이 채 안 된다. 눈물과 그리움이 담긴 반찬 앞에서 철없는 딸들은 다른 집처럼 계란이나 소시지가 먹고 싶다며 투덜댔다. 비싸지도 않은 무와 간장으로 만든 반찬을 다섯 딸은 마음대로 먹지도 못했다. 무말랭이로 숟가락을 뻗을라 치면 외할머니는 매서운 눈초리로 "젓가락으로 먹으라우!"라고 했다. 얼마 없는 무말랭이를 다섯 딸이 골고루 나눠먹게 하려고 그랬던 거였는데. 삶의 무게에 눌린 외할머니가 눈물로 버무린 반찬에 담긴 사랑은 사라지고 날카롭게 뱉은 말만 어린 딸들의 마음에 박힌 거다.
그렇게 외할머니의 무말랭이 속에는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가난했던 지난날 다섯 딸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 미안함이 켜켜이 스며있었다. 다른 친척 언니 오빠들은 맛이 없다며 안 먹는 무말랭이를 나는 할머니의 예쁨을 받으려 한 숟가락 가득 퍼먹었다. 외할머니는 영악한 내 속을 아셨으려나……. 나를 주려고 만드셨다며 손바닥만한 사기 반찬 그릇에 담아주신 이북식 무말랭이는 사실 우리 집으로 가면 꽤나 오랫동안 냉장고 한켠을 차지하다 결국 곰팡이가 났었다. 과거와는 다르게 식탁에는 계란과 소시지는 물론 각종 반찬과 피자, 치킨 등이 차고 넘쳤다. 무엇보다도 집에서까지 외할머니 기분 좋으라고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북식 무말랭이는 만들기 까다로운 데다가 맛까지 심심해 가성비 떨어지고 인기 없는 반찬이 됐다.
외할머니 앞에서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반찬이었던 무말랭이는 할머니 연세가 8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식탁에서 사라졌다. 할머니의 몸은 무를 잘게 썰만큼의 힘을 내지 못했고, 연골이 사라진 온몸의 관절 사이가 고통을 뱉어냈기 때문이다. 명절에 떡국 대신 토란국을 먹고, 다른 집보다 좀 더 자주 평양냉면과 북한식 완자집을 찾아가는 것으로 할머니의 향수병을 달랠 뿐이었다.
가족을 북에 두고 남으로 내려온 외할머니의 형제들은 백두산 국경지대 등을 활용해 50년 넘게 갖은 방법으로 어머니(외증조할머니)를 찾았다. 2000년대 초반이 돼서야 증조할머니의 묫자리 위치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찍은 사진만 찾았다. 무용을 잘했던 막내딸의 머리가 다 희고 얼굴은 쭈그렁 방탱이가 된 모습을 꼭 어머니께 보여드릴 거라는 말을 할 때면 외할머니는 아이처럼 행복해했었는데 말이다. 아주 어릴 때 어깨너머로 본 게 전부인데도 엄마가 하던 맛을 그대로 냈다며 당신이 만든 무말랭이를 꼭 드리고 싶다고 했었다.
부잣집 막내딸을 억척스러운 보따리상으로 바꿔버린 38선, 모녀가 가장 좋아했던 반찬통을 들고 친정집 가는 길도 막아버린 휴전선. 수많은 이의 운명을 갈라버린 이 선을 넘어 하늘에서 만난 증조 외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서로의 흰머리와 주름을 매만지며 몇 시간을 부둥켜안고 울었겠지. 그러고 나서 하늘에도 무가 있다면 모녀는 돌 같은 무를 잘게 썰고 또 썰어 밝은 볕에 말리고 계실 것 같다.
놀랍게도 외할머니의 무말랭이 레시피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다섯 딸을 포함해 정말 아무도 없단 말이다. 야속하기도 하지. 나는 무를 써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임을 알고도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려고 무말랭이를 한가득 퍼먹기만 했다. 다섯 딸들, 이모들에겐 그저 어린날의 상처이자 지긋지긋한 무말랭이였을 뿐이다.
그래도 빨갛고 아삭하고 두꺼운 무말랭이를 먹을 때면 "이건 진짜 무말랭이가 아니야"라는 생각을 참지 못하고 말로 뱉어내는 우리는 분명히 외할머니가 낳고 빚은 딸들이다. 뜬금없이 외할머니가 그리워 목이 메일 때 엄마와 무를 썰어 볕에 말려야겠다. 나중에 외할머니를 만나면 그리고 외할머니의 엄마를 만나면 나도 꼭 자랑하려고. 외할머니가 만든 거랑 똑같은 맛을 찾았다고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