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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며니 Aug 12. 2023

세상에 이런 이력서도 있습디다

꾸준히 그만두고 있습니다

"중간에 그만두면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해. 끝까지 할 자신 있어?" 한 달 넘게 발레 학원을 보내달라고 조르던 나에게 엄마가 던진 질문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가 무언가 하고 싶다고 하면 이렇게 물었다. 공주 같은 핑크색 발레 옷이 입고 싶었을 뿐 오래 다닐 생각은 없었던지 엄마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발레 선생님이 어깨를 눌러 다리를 찢을 때 허벅지 뼈가 부러질뻔했다, 한 시간 동안 팔 들고 벌서는 것 같다는 등 친구들의 고통 간증이 떠올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면 학원은 안 가도 발레 옷만 사주면 안 되느냐는 응석도 엄마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는 300만 원 은행빚을 안고 옥탑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해 당신 얼굴에 바를 스킨과 로션 살 돈까지 아꼈다. 이래야 한 달 생활을 꾸릴 수 있던 엄마의 소비 기준은 투자대비 성과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결국 그렇게 입고 싶던 날개 같은 튀튀 스커트와 발목을 리본으로 감싼 토슈즈는 목적 없는 욕망이라는 이유로 꿀꺽 아쉬운 눈물과 함께 속으로 삼켜야 했다.


과도하게 억눌린 욕망은 언젠가 폭발한다고 했던가. 살고 싶은 대로 일상을 구상하며 돈을 벌기 시작한 성인이 되고부터 '중간에 그만둬도 괜찮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다. 아니면 꼭꼭 묻어둔 청개구리 심보가 마음속에서 족쇄를 풀고 나온 건지 오지게도 무엇이든 꾸준히 그만뒀다.


먼저 취미. 근육 굴곡까지 보이게 딱 붙는 하얀 타이즈에 토슈즈를 신고 커다란 거울 앞에 선 나를 보며 행복했던 성인 발레교실 3개월, 얼음 위를 나비처럼 날아디는 김연아 선수처럼 되고 싶었지만 빙판 위에 올린 지렁이처럼 넘어져 힘없이 꿀렁대다 끝난 6개월, 지구의 70%를 넘게 차지한다는 바닷속 세계를 유영하고 싶어 시작한 스킨스쿠버 다이빙 5개월, 서커스 단원처럼 중력을 거슬러 빙글빙글 우아하게 도는 폴댄서를 꿈꿨던 한 달, 거미처럼 바위를 맨손으로 올라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등록한 실내 암벽등반 3주... 간만 봤던 취미생활이 기억도 못 할 정도로 한 트럭이다.


아르바이트도 과외 선생, 특수학교 교사, 패밀리레스토랑 서버, 특수청소업체, 물류 창고 바코드 찍기, NGO단체 활동가, 모델 등 체험 삶의 현장마냥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대외활동 역시 영국 대사관, 문화원, 방송국, 해외 고아원 등 닥치는 대로 지원하고 경험했다.


취미야 요즘은 하루만 체험할 수 있는 원데이 클래스들도 있고 아르바이트 역시 꾸준할 필요 없이 내 맘대로 하면 되는 거다. 하지만 직업은 다르다. 업종을 바꾸면 이전의 경력과 기술을 인정받지 못해 시장에서는 생산성 없는 인간이 된다. 자본주의제도의 인력 시스템은 효율을 중시해 이전 업무와 무관한 분야로의 이직 기회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회사와 직무는 예측 가능해서 정상의 범주를 벗어날 정도로 이력이 변화무쌍한 인간을 채용하기 꺼려한다. 시스템이 오류 없이 정밀하게 돌아가도록 돕는 단단한 부품이 아닌 제멋대로 생긴 무언가는 회사의 생산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서다. 때문에 회사나 직종이 자주 바뀌는 사람은 인력 시장에서 하급상품 심지어 폐기 상품으로 분류된다. 직업 선택에 있어서는 욕망에 충실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보는 사람마다 한숨을 쉬는 내 이력서를 보니 세상에 안정 알레르기라는 병이 있다면 내가 바이러스를 만든 건 아닌가 싶다.


[이력서]

2006~2013 경영학부, 신문방송학 복수전공

2006 신문사 인턴

2007 주택금융공사 인턴

2008 한국은행 시장조사원 아르바이트

2009~2010 증권사 인턴, 에티오피아 구호 사업지 방문, UNESCO유럽 프로젝트 등

2011 미스코리아 대회 출전

2011~2012 중동 무역회사 직원, 외국계 기업 인턴

2013~2015 저널리즘 대학원 석사, 사회복지사, 언론사 인턴

2015~2016 언론사 직원

2016~2017 대기업 전략 컨설턴트

2017~2018 국회 인턴

2019~2020 인터넷 매체 기자, 장례지도사 자격증 취득

2020~2021 국회 직원

2021~2022 장례지도사, 프리랜서 영화제작, 작가


이 난리부르스 이력의 결과물은 경제적 자유도, 대단한 부귀영화도 아니다. 그저 그런 인생보다 조금 아래정도 되려나.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내 집은 없고 단기 알바부터 대기업 보고서 하청까지 최저 임금에서 고액 월급 수준으로 수입이 들쑥날쑥이다. 심지어 아이까지 태어났고 남편의 수입도 편차가 커 저축해 놓은 돈 없이 필요한 만큼 돈을 벌고 있다.


여기에 더해 내 이름 석자보다 나의 출신과 직장이 우선인 이들과의 교류 또한 멈췄다. 어차피 나의 선택을 소속과 지위 한 단어로 평가하는 이들은 내 생활방식을 '듣는 것만으로 두통을 유발할 뿐 자산을 늘리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되며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탈'정도로 단정한다. 안정적인 수입과 힘 있는 인맥 등 기댈 곳들로부터 절연한 흔적이 바로 저 이력서다. 다만 나에게 해로운 환경이라는 징조를 기가 막히게 포착해 나 그리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제대로 지켰다.


시원하게 퇴사를 지르고 나서 불안함을 잠재우는 방법은 '있어 보이는'회사로의 재입사였다. 이력서 안의 회사들에서도 한국은행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 모두 정직원 제의와 승진을 제안받았다. 다닐 때는 회사에 뼈를 묻을 사람처럼 시키지 않은 일까지 도맡아 하는 성실한 노동자였다는 말이다. 그만둔 곳에서 맺은 인연들 역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적이 되어 척을 지는 사람도 몇 있었지만 손발 맞춰 일하며 좋은 기억을 만든 선후배도 여럿이다. 좋은 회사에서 좋은 사람들과 일하며 뿌리내리길 권유받은 후 뜬금없는 퇴사 결정을 했고, 전 직장에 두고 온 단단한 미래를 후회해 본 적은 없다.


꾸준히 그만둘 수 있는 이유는 꾸준히 무언가를 시작해서였다. 내 방식대로 청춘을 금전에 구애받지 않고 소비하고 싶었다. 나의 남은 생애를 뒷받침할 수단이 결정된 재미없는 미래를 말없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안정'은 나를 해치지 않는 사람들과 예측 가능한 일상을 지속적으로 사는 것이다. 말 그대로 안녕한 인생. 자식이 안정적으로 뿌리내려 고생하지 않고 살길 바라는 마음은 '꾸준함'에 대한 강요로 나타나곤 한다.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통보했을 때,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에게 다시 생각하라고 설득했던 부모님과 친구들의 마음이 사랑임을 알고 있다. 정글 같은 회사에서 우산이 되어줬던 선배들은 서른둘이 넘은 나에게 '이제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려야 되지 않겠냐'며 만류했다. 직업이 없는 또는 불안정한 사람은 결혼 시장에서마저 탐탁지 않은 상대로 분류되곤 하지 않나.


그럼에도 그만두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실패했다고 쉽게 재단당하며, 망가질 수는 상황에 계속해서 던졌다. 명확하게 보이는 미래, 내가 58세까지 벌어들일 수입까지 계산할 수 있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았다. 달콤한 안정을 보장받고도 소속 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가 시스템 오류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여럿 있었다.


풍랑 없이 안정된 삶도 고단하기는 매한가지라는 것도 잘 안다. 조직 안에서 생존하며 꾸준히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는 서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눈다. 장기 근속자는 금방 그만두는 이를 손가락질하고, 공무원은 철밥통이라 비하하고 회사원을 파리목숨이라고 놀린다. 직업과 연봉 비교를 통해서만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는 씁쓸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퇴사가 마렵지만 꾹 누르고 다니는 이도, 퇴사를 싸질러버린 이도 모두 마음 불편히 최선을 다해 살고 있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조차 욕망에 따라 할 수 없어 억누르고 산다. 생산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해보자. 6개월마다 직업과 직종을 바꾸면서 사는 피곤한 인생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또는 다른 종류의 능력이 될 수도 있으니.


마음대로 그만두면서 인력 시장에서 폐기처분 당하지 않는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월급과 내 욕망을 맞바꾸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괜찮을 수 있는 방법도 함께. 누군가는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프다고 했던 내 이력서는 나를 망칠 기회를 겁 없이 누리며 나만의 세계를 찾은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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