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의 첫 휴가
마당의 매화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던 4월 중순의 어느 날,
서울에서 남편이 내려왔다.
전쟁으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고 했다.
시집을 오고 얼마 후, 전쟁이 났다고 했지만 여자의 생활에 큰 변화는 없었다.
남편도 서울과 본가를 오가며 별 다른 변화 없이 지내왔었다.
그런데 휴교령이 내렸다며 돌아온 남편은 본가에 오래 머물렀다.
여자는 돌아온 남편이 너무나 반가웠다.
그새 남편은, 원래도 희고 고운 피부가 더 하얘져서 동네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남편이 때로는 어렵게 느껴져서 공연히 멋쩍게 웃기도 했다.
남편이 서울에 있는 동안 여자는 부지런을 떨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본디 부잣집 막내딸이라 시집오기 전에는 손에 물 묻힐 일이 없었다. 그리고 시집도 일꾼들이 여럿이라 딱히 여자가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부지런히 동네를 오가며 물을 긷고 저녁에는 동네 아낙네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베를 짰다. 베를 짜며 부르는 노래는 한없이 느리고 처연했으므로 여자는 그 노랫가락 속에 자신의 외로움을 마음껏 실어내곤 했다.
이렇게 일하는 게 차라리 속이 편했다.
아낙네들과 어울려 일하는 동안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 여자는 혼자 잠을 잘 때 간혹 악몽을 꾸곤 했다.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입이 찢어지며 괴물처럼 변해버린, 첫날밤의 신랑을 꿈에서 보는 것이다.
그런 날은 가위눌린 듯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벌벌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탈진해서 누운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야 했다. 비교적 활달하고 유쾌한 성격의 여자는 이런 자신이 무척이나 낯설었지만 혼자 견뎌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여자의 몸은 야위어 갔고, 희고 곱던 피부는 동네 여인들처럼 검게 그을려졌다.
고향에 돌아온 남편은 거의 집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다. 그는 늘 두꺼운 책을 끼고 그 책을 읽는데 열심이었다.
그게 무슨 책이냐고 물으면 남편은 다정하게 말했다.
"법전이야, 내가 책만 보니까 심심해?"
남편은 웃었지만 여자는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 쓸쓸했다.
남편이 오고부터 여자는 바깥일은 하지 않고 오직 남편과 시부모의 시중만 들었다.
모내기로 마을 전체가 분주한 때도 남편은 마당의 커다란 나무밑 평상에 누워서 책을 읽었다.
그런 모습이 뿌듯하면서도 왠지 낯설기도 했다.
여자는 빨리 아기라도 낳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온 지 6개월이나 됐을까.
추석명절을 지난 지 얼마 안 된 구월의 어느 날이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저녁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남편이 말했다.
"저.. 이번 달 말이면 입대합니다."
순간, 수저를 쥔 여자의 손이 멈췄다.
바람처럼 그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주 앉은 시어머니도 밥숟가락을 멈추고 아들을 쳐다봤다.
"벌써 날짜가 돌아온 겨어?"
시아버지는 짐짓 무심한 듯 물었지만 아들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았다.
"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그때 가면 첫 휴가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남편은 담담하게 말했다.
말을 하며 그는 여자를 바라봤다.
그러나 여자는 남편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얼어붙은 듯 어느새 몸이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날밤, 남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뜨겁게 아내를 안았다.
그의 손은 더 살뜰히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마치 아내의 얼굴에 자기 손바닥이라도 새겨 넣을 듯이.
이달 말이라 봐야 이제 고작 닷새 뒤이다.
이걸 남편이나 여자나 모를 리가 없었다.
남편이 돌아온 날부터 여자는 매일 손가락을 꼽아가며 남은 날짜를 셈했고, 남편은 매일 적는 일기장에 그 날짜를 지워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그날에 대해서는 서로 말하지 않고 지내왔던 건, 학교를 가는 것과 군대를 가는 것이 주는 무게감이 엄청나게 달랐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 무게감에 아내가 무너질까 두려웠다. 아내를 남겨두고 홀로 서울로 향했을 때도 그는 아내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방학이 아니어도 기회만 되면 집으로 내려오려고 애썼던 것이다.
시부모님은 그다음 날부터, 닷새동안 내내 잔치를 벌였다.
남편이 군대를 가는 것은 온 가문의 큰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9월이 끝나갈 무렵, 남편은 입대를 했다.
혼자 남은 여자에게 그해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고, 해가 바뀌어 다시 봄이 돌아왔다.
그날은 유난히 햇볕이 따사했다.
마치 땅에서 안개가 올라오듯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4월의 오후였다.
여자는 툇마루에 앉아 햇빛을 쬐고 있었다.
두 손을 맞잡고 앉아있는 여자의 하얀 손 사이로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배가 보였다.
햇살에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찡그리고
아지랑이를 바라보던 여자가 하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살짝 졸음기가 느껴졌다.
방에 가서 누울까 생각하며 일어서려던 순간 무슨 소리인가에 다시 툇마루에 앉았다.
대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영식아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방님 오셨이유~"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새 군복을 입은 한 사내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남편이었다.
소식도 없이 남편이 돌아왔다.
성큼성큼 다가온 남편은 웃으며 힘 있게 여자를 끌어안았다.
남편의 품속에서 여자는 이 순간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꿈인가 싶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남편을 안은 손에 꼬옥 힘을 주었다.
해피마망의 연작 소설,
"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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