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동, 첫 약속
“느이 아버지는 남들보다 늦게 휴가를 나왔어.
딴 사람들은 서너 달 만에 첫 휴가를 나왔는데, 느이 아버지는 여섯 달이 다 되어서야 첫 휴가를 나왔거든.
근데 첫 휴가를 나온 느이 아버지를 보고 다들 깜짝 놀랐지 뭐여~”
엄마는 늘 같은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수십 번은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얼굴이 장밋빛으로 달아올랐고,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실렸다.
그것은 감출 수 없는, 남편에 대한 자랑스러운 자긍심 같은 것이 아닐까.
엄마가 아직도 아버지에 대해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새색시 시절의 엄마는 내가 아는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쪽이 저릿해지는 아픔을 느꼈다.
“아니, 남들은 군대 갔다 첫 휴가를 나오면 삐쩍 골아갖고 오는데,
느이 아버지는 살이 뽀야니 통통해서 왔다니까~
나중에 사 알았는데, 부대서 그림을 그렸다더라. 미군들 초상화를 그려주고, 미군들이랑 같이 살았댜~”
아버지는 충청도가 고향이었지만, 당시 군복무는 제주도에서 했다.
그곳에는 미군들이 주둔해 있었고, 아버지는 영어로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에 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말수는 많지 않았지만, 다정하고 사근사근한 성격 덕분에 미군들에게 꽤 인기가 좋았다.
우연히 한 미군의 초상화를 그려준 것이 화제가 되면서, 아버지는 아예 전담으로 그들의 얼굴을 그려주게 되었다.
연필 한 자루만 쥐면 종이 위에 그들의 얼굴이 살아났다.
담배를 문 장난기 어린 웃음, 고향을 향한 젊은 군인의 쓸쓸한 눈빛까지도 아버지의 손끝에서 낭낭하게 피어났던 것이다.
“굿 드로잉! 유 베리 탤런트!”
초상화를 받아 든 미군들은 아버지의 어깨를 두드리며 함박웃음을 터뜨렸고, 아버지는 다른 군인들과는 달리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사실 아버지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손만 대면 새로운 생명을
화폭 위에 마음껏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의 그림 몇 점을 본 적이 있었다.
호랑이나 산을 그린, 사실적이고 세밀한 동양화풍의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독특한 그림이었다.
마치 아버지의 못다 핀 꿈처럼 아련함이 서려있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다.
미대 다니는 친구에게서 얻은 캔버스와 물감으로 내 자화상을 그린 적이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내 옆 얼굴을 그린 건데 대체로 회색과 짙은 푸른 색의 어두운 색조에, 마지막으로 찍은 눈동자만 희게 빛나는 우울한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오자 엄마는 그걸 아버지께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그림을 받아쥐고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정말 네가 그렸냐?
우리 딸이 유화를 이렇게 잘 그렸구나.”
빛이 번지 듯 환하게 웃던 아버지의 그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남편이 돌아온 그날 밤.
여자는 그의 손을 잡아 살그머니 배 위에 올려놓았다.
놀란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던 남편의 얼굴이 곧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이야…?”
남편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 끝은 금세 소리없는 웃음으로 번져 나갔다.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비밀처럼 간직해 온 기쁨을 이제 막 내어놓은 순간이었다.
여자의 마음이 낮게 두근거렸다.
잠시 후, 그는
손끝에 전해지는 아주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마치 배 속에서 작은 새가 날개를 파닥이며 신호를 보내는 듯한, 희미하지만 또렷한 태동이었다.
“느꼈어… 지금 움직였어. 우리 애기가… 이렇게 있구나...”
남편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그는 손으로 아내의 배를 오래 쓰다듬으며 다짐했다.
'나는 이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 기적을 끝까지 지켜내리라.'
여자는 그런 남편의 웃는 듯 우는 듯한 얼굴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서 묵직한 책임감과 어린아이 같은 설렘이 동시에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은 여자의 마음에 설명할 수 없는 평안함을 안겨주었다.
어느새 여자의 눈에서도 뜨거운 물방울이
한 방울 떨어젔다.
“이제 우리 둘만의 길이 아니야. 셋이 함께 가는 길이야.”
울음이 섞인 아내의 말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나도 이젠 아버지야,
우리 함께 지켜나가자.”
그날 밤, 작은 태동은 두 사람에게 주어진
첫 번째 약속 같았다.
그 약속을 가슴에 품으며, 두 사람은 이제 부모로서의 길 위에 나란히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기의 울음소리는 이 작은 집에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어 줄 것이다.
여자는 그 순간부터, 한 아이의 어머니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