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도 괜찮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언니와 나를 분리하기 시작했을 때

by 공재

중간중간 일정이 겹쳐 그녀를 다시 만난 건 2주일 후였다. 언니가 너무 밉다며 울음을 터뜨린 뒤 처음으로 다시 만난 날이었다.


며칠 전, 그녀는 언니와 크게 다퉜다고 했다. 평소 언니가 화를 내면 싸우기 싫어서, 혹은 무서워서 언니의 감정 폭발을 받아 주거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언니를 가만히 지켜보았다고 했다. 말없이 쳐다만 보는 그녀의 태도에 감정이 격해진 언니가 그녀를 밀쳤고, 그녀는 “내가 이래서 언니가 싫은 거야.” 폭력 앞에서 늘 움츠러들던 아이가 두려움을 무릅쓰고 자신도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그 당시를 회상하며 그녀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말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반항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작고 미미하게 느껴져 ‘나는 나 자신조차 지킬 힘이 없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화를 맞받아친, 평소와는 다른 동생의 태도 때문이었는지 언니는 잠시 움찔했고, 더 이상 폭력적인 상황을 만들지 않은 채 몇 마디를 더 하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했다.




그녀가 느낀 것과 달리 그 작은 반항은 결코 미미하지 않았다. 그냥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니와 자신을 조금씩 분리하기 시작했다. 닮고 싶지만 또 닮고 싶지 않았던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했던 언니, 자기 표현에 거침이 없고 늘 강해 보였던 언니, 바깥에서는 조용하지만 집안에서는 가장 큰 존재였던 언니. 그 사람은 어떤 모습이든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그녀는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불같이 화를 내거나 폭력적인 모습을 보고 난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배달음식을 시켜 같이 먹자고 불러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의 방 앞에 언니가 디저트 상자를 놓고 갔을 때도 이전처럼 분노나 짜증이 올라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 언니가 또 이렇게 화해를 청하는구나.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그렇게 덤덤하게 바라보았다고 했다.


이전과는 다른 태도와 반응을 보이고 난 뒤 경험한 것들, 느낀 점, 그리고 지금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그녀는 두서없이 나누었다. “나는 언니와 닮지 않은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소심한 내가 싫었고, 뭘 해도 내가 잘 못한다는 생각은 거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언니와 나는 정말 다르거든요. 그런데 문득 언니를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처음 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언니가 맞거나 틀리다는 판단이 아니라, 그녀가 그 관계 안에서 주관적으로 경험해 온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을 이어가던 그녀가 문득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선생님, 어쩌면 나도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평생 처음으로 해봤어요.”

화면 캡처 2026-01-25 192117.jpg



그 말이 너무 반가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마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는 정말 잘 지내 보인다”, “예쁘다”, “잘 하고 있다”는 말을 옆에서 아무리 건네도, 정작 본인이 그렇게 느끼지 못하면 그 말들은 좀처럼 당사자에게 닿지 않는다. 상담은 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를 만큼 복잡하고 버거운 마음을 마주하는 일이지만,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 여겨진다’는 말을 스스로의 입으로 꺼내는 순간을 만날 때면, 나는 잔뜩 엉킨 실타래를 끊어내지 않고 함께 풀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 일을 쉽게 멈출 수가 없다.


수퍼비전 시간, 그녀의 사례를 모두 들은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이 아이 이야기를 할 때 표정이나 말투가 많이 격해져 있어요. 너무 도와주고 싶은데, 그걸 어쩔 줄 몰라 불안해하는 느낌이 전해져요. 혹시 이 아이가 선생님 같다는 생각이 드나요?”


나는 그 아이에게 나를 많이 투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슷한 감정결, 비슷한 세계관, ‘남들 다 괜찮아도 나는 늘 어딘가 안 괜찮은’ 마음까지도. 상담실에서 나는 종종 쉽게 말한다. “그냥 그 사람에게 말해보세요.” “용기를 내 보세요.” 하지만 가장 용기가 없고 직면하지 못한 채 도망치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나인지도 모르겠다. 회피하고 미루고 때로는 외면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내 문제는 풀지 못하더라도 또 누군가에게는 작은 실마리를 건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회복을 조용히 응원하면서 내 안에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나도… 괜찮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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