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고통을 느끼는 걸까? 공통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이나 아픔] 조금만 더 드려다 보자.
우리의 몸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전자가 존재한다. 우리는 전자가 보내는 전기신호를 통해 움직인다. 고통도 그렇다. 전자가 다른 전자와 밀어내는 것을 통해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그렇다면 왜 굳이 고통을 느껴야 할까?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훨씬 편할 텐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고통에서 벋어 나고 싶어 할 것이다. 몸이든 마음이든 아프지 않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질 테니 말이다.
영화 <통증>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 나온다. 실제로도 존재한다. '선천성 무 통각증'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촉감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추위와 더위까지도 말이다. 그들이 부러울 수도 있다. 나도 처음 이 병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곧 위험한 생각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땀을 흘리지 못한다. 땀을 흘리지 못한다는 건 체온조절을 못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분분의 환자가 3세 이전에 열사병으로 사망한다고 한다. 팔이 부러져도 칼에 베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 하기에 대처를 하지 못 한다.
우리는 아기일 때부터 수도 없이 운다. 배가 고파서 울고 불편해서 울고 걸으려다 넘어져서 울고 아파서 운다. 그렇게 우리는 고통에 취약하게 태어났다.
고통은 몸이 보내는 위험 신호로써 늘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고통이 있기에 안전하게 밥도 먹을 수 있고 온전히 숨을 쉴 수도 있다. 우리는 고통을 이겨내어 일어났고 마침내 걷게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뛸 수도 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학습해왔다. 갓난아기 때부터 수많은 고통을 겪으며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도 보았고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뼈가 부러져보기도 했다.
그리고 타인이나 나로 인해 좌절감에 빠져 우울해진 적도 있을 것이다. 이런 우울은 내가 초라하고 한심하게 느껴져 괴롭고 아플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은 늘 언젠가 끝이 난다.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우리는 이겨낼 것이다.
시인 프리디히리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몸이 고통을 이겨내지 못할 만큼의 강한 고통. 그런 고통을 제외하고 우리는 기어코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아인슈타인은 그랬다. "나는 똑똑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문제를 더 오래 연구할 뿐이다" 그렇다. 단지 나를 더 깊이 드려다 보고 있을 뿐이다.
빌 게이츠는 그랬다. "성공을 자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패를 통해 배운 교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저앉아 멈춰 섰더라도 고통을 딛고 일어서면 된다.
작년의 쓴 글 중에 유전자의 관한 글이 있다. 거기서도 말했듯 고통을 느끼고 나를 채찍질해 괴롭히는 것이 유전자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의 유전자가 우월하다는 것이다. 이런 변태 같은 유전자지만 덕분에 우리는 이 거대한 문명을 누리고 살고 있다. 그러니 의연해지자. 나를 괴롭히는 고통은 나를 죽일 만큼 그리 대단한 놈이 아니다. 이겨낼 것이다. 두 발 딛고 일어나 걸었던 것처럼 말이다.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이 세상에 나보다 중요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완벽해질 필요도 없다. 사실 이 세상에 완벽이라 할 만큼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