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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유목민 Mar 16. 2022

내 지갑을 활짝 열어젖힌 사장님

긴 시간이 지나도 기억해주면 감동을 받는다

 공연 예산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외식과 배달은 자제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요즘 나는 30일 놓아주기 도전을 하고 있다. 1일째에는 1개, 2일째에는 2개,... 30일째에는 30개의 물건을 나에게서 놓아주는 도전이다. 어제 16개를 놓아주었어야 하는 날인데 브런치 일기 쓰는 것까지 잊고 열심히 해도 몇 개가 모자라 어제치와 오늘치를 합해서 16개를 버렸다. 예상보다 많이 힘이 들어 연속으로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천천히, 언젠가는 (1+2+...+30) 개의 죽어가는 물건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싶다. 끝내 숨통이 트이게 될 내 공간이 기대된다.


 의외로 챌린지를 쉽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들이 있다. 냉장고에 가득 붙어있는 음식점 쿠폰들이다. 지난번 한 피자집에선 쿠폰 이벤트가 끝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기 때문에 이번에 도전하는 음식점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역시나 쿠폰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거니 다른 상점이 전화를 받았다. 이미 폐업한 음식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점명이 같은 음식점에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설명하니 사장님의 반응이 의외였다.


"거기는 2년 전쯤인가 폐업했을 거예요."

"웬만하면 쿠폰을 쓰게 해드리고 싶은데... 본사에 물어볼게요."

 남의 음식점이 발급한 쿠폰을 쓰게 해 줬으면 좋겠다니. 감사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본사에 물어봤는데요, 저희가 처리해드릴게요. 그래도 쿠폰 개수를 들어보니 자주 이용하신 것 같은데."

"나중에 주문할 때 말씀 주세요."


"아, 지금 바로 주문할게요."

마침 배고플 때라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신난 나는 쿠폰 5개와 쿠폰 2개를 사용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어.. 주문 한 번에 쿠폰을 여러 번 사용할 수는 없지만 상황이 특수하다 보니 한 번에 처리해드리겠습니다."

 또 한 번의 배려를 받은 나는 다음번에도 배달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전화해 주문하리라 마음먹었다.


 다행히 음식의 질은 지난번에 폐업한 음식점보다 훨씬 나았다. 거리는 더 멀어져서 배달비는 약간 올라갔지만 같은 브랜드여도 음식의 질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당사자가 아닌 분이 나를 단골손님으로서 기억해주시니 소소하지만 꽤 강한 강도의 감동을 받았다. 마케팅, 홍보 기법의 일종이라 볼 수도 있지만 같은 장소의 가게에서도 거절받은 경험들이 있어서 보기 쉽지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한 교양 프로그램에서 정말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소소한 것을 기억해줄 때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고 강연한 심리학 교수가 생각난다. 마침 정말 오랜만에 가게에 들러 참치 김밥을 주문할 때 마요네즈 듬뿍 넣어 주셨던 김밥집 사장님도 생각났다. 그리고 독서 모임 때 지난번에 들었던 내용을 기억해서 다시 이야기해줄 때 상대방이 내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여주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들을 것 많고, 읽을 것 많고, 기억할 것이 많은 세상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읽고, 기억해주는 일이 얼마나 가슴 벅찬 기쁨인지를 다시 깨닫게 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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