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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유목민 Dec 31. 2021

내 생애 가장 당당한 오답

어디에서든지 당당한 꼴찌로 시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5년 전 제대하고 다녀온 국외여행을 돌이켜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멋진 풍경도, 맛있는 음식도 아니다.


독일 여행 중, 나는 일본식 호스텔에 머문 적이 있다. 오랜 유럽식 식사에 지칠 때쯤, 그곳의 메뉴인 샤부샤부는 나에게 너무 반가웠다. 식당은 학교 구내식당처럼 넓었고 사람들은 뜨문뜨문 앉아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바삐 오가는 서버들은 음식을 갖다 놓으면서 손님들에게 먹는 방법을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었었다. 그런데 내 차례가 되었을 때 한 서버는 나를 보고는 씨익 한 번 웃으며 인사하더니 그냥 주문한 음식을 주고 가버렸다. 내가 동양인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샤부샤부를 다 알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걸까.


다행히 나는 샤부샤부를 좋아해 동네의 샤부샤부 집은 다 찾아가므로 당황하지 않은 척, 일본인인척 태연하게 수저를 들었다. 어차피 익숙한 세팅이니 문제없겠지. 나는 정신없이, 허겁지겁 내 쟁반에 담긴 채소를 샤부샤부 냄비에 넣었다 꺼내 먹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마주 보고 있었던 한 손님이 나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나랑 비슷한 순서에 음식을 받았다. 식사 옆에 술이 있긴 있었지만 아주 많이 남아있었으므로 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더니 황급히 식사를 버리며 자리를 떴다. 몇 초 동안 의아했지만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진 않았으므로 다시 식사를 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나는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쟁반에 있는 음식을 다 먹고 나니, 샐러드 드레싱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사실 나는 샐러드용 채소를 샤부샤부 냄비에 익혀먹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양상추의 실루엣이 뇌리를 스쳤다. 음식을 지레짐작하고 내 맘대로 먹는 버릇은 그 이후에도 이어져 에비동 가게에서도 비슷한 실수를 하게 됐다.

https://brunch.co.kr/@happynomad/2


그 손님은 내가 그렇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해서 자리를 뜬 것이 아닐까. 내가 틀렸는데 나는 당당했고, 정답을 맞힌 손님은 부끄러워한 것이 아닐까. 나의 외모로 인한 편견이 유리(?)하게 작용한 셈이었다.


돌아보니 나는 정답을 맞힌 손님처럼 부끄러워하며 살아온 것 같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앞에 두고도 남들한테 '나 이거 좋아해?', '나 이거 잘할 것 같아?' 하며 물어보며 산 것 같다. 결국에는 되는 이유보다 안 되는 이유만 들여다보며 옆으로 치울 거면서. 그때 생각한 안 되는 이유가 지금 돌아보면 비합리적이었는데도. 나한테 도착한 합리적인 시그널들을 무시하면서 자기가 잘하는 일이나 좋아하는 일로 취업한 동기들을 질투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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