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이 안 빠질 때

그릇 하나쯤은 버려도 된다, 아니 두 개는

by 기억의 틈

하루의 시작이든 끝이든

싱크대 앞에 서 있는 나는

종종 아무것도 아닌 그릇 하나에 지친다.


쌓여 있는 그릇들.

설거지를 하려고 손을 뻗었는데

꼭 그럴 때마다

그릇들이 서로 딱 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포개진 채로 끼어 있는 그릇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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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럽고 단단하게 맞물려서

아무리 힘을 줘도 헛돈다.


“왜 이렇게 안 빠져......”

작게 내뱉은 그 말에 그날의 피로가 다 들어 있었다.

사실 큰일도 아니다.

그릇 두 개 안 떨어지는 게 뭐라고.


조금만 힘을 더 주거나

잠깐 두면 언젠가는 떨어질 테니까.

그런데도 그런 순간은

이상하게도 사소한 일이 마음을 건드린다.


딱 맞춰 겹쳐진 그릇처럼

내 하루도 그렇게 빡빡하게 포개져 있었던 것 같다.


쉬려는 마음 위로 해야 할 일이 겹치고

생각 위로 또 생각이 겹치고

말 못 한 감정들까지

차곡차곡 포개져 도무지 빠지질 않는다.


그런 사소한 순간에 마음이 툭 하고 무너질 때가 있다.

그래서였을까.

그릇이 안 빠지는 건데

자꾸 내가 안 풀리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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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당겨도

흔들어도

기울여도 떨어지지 않는 것들


포개졌다는 건 쉬라는 뜻이 아니라

더 단단히 붙어버렸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가끔은 생각한다.

나도 저 그릇처럼 잠시 따로 떨어져 쉬고 싶다고.

누군가 부드럽게 잡아당겨서 말랑하게 떼어내 주면 좋겠다고.

그래서 내 마음도, 내 하루도, 다시 제자리에 놓일 수 있게.

......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좀 달랐다.

그 그릇,

아무리 해도 안 빠져서 결국 그냥 버렸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다.

기다려도 안 되는 거

붙은 채로 도무지 안 떨어지는 거


그럴 땐 억지로 애쓰느니

그냥 인정하고 놓아버리는 것도 나를 위한 선택일 수 있다.


다음엔

짜증 대신 한숨 하나 쉬고

그릇 하나쯤은 버릴 줄도 아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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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쌓일 게 너무 많으니까.

그중 나 자신까지 너무 꼭 포개놓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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