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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Nov 26. 2019

영어 발음치, 불편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아요.

서툰 영어로 미국 학교에서 일하는 한국 아줌마의 미국 학교 생존기



생존 영어로 미국 학교의 특수학급에서 보조 교사로 일하고 있는 한국 아줌마가 

미국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생존의 기술, 그리고 그 몸부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국 생활이 9년 차에 접어들고 있고 미국 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한 지 3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나는 영어 발음치다. 

영어 발음을 제대로 못해서 오해를 받는 일만 있는 게 아니라 미국인들의 영어 발음을 제멋대로 알아듣고 엉뚱한 반응을 보여 상대방을 황당하게 만들기도 한다.  




3번 방에서의 생활이 막 시작된 어느 날, 아이들이 하교한 빈 교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담임교사 Ms. K가 나에게 "Ms. P, could you turn on the laminate?"라고 물었다.

교실 정리에 집중하던 차에 내 귀에 들어온 단어는 Lemonade 레모네이드였다.

"Yes, where is the lemonade?"

"In the workroom"

작년에도 몇 번이나 복사기가 있는 학습 준비실인 Workroom에서 학습지를 복사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 방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Workroom에는 냉장고가 없는데 도대체 레모네이드가 어디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거기 가면 있나 보다 싶어서 대답하였다.

"OK, Do you have a cup?"

그러자 Ms. K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Cup? for what?"

"For lemonade."

Ms. K와 함께 교실 정리를 하던 다른 보조교사 Ms. S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I meant the Laminate."

갑자기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하면서 Workroom의 복사기 옆에 있는 커다란 코팅기가 스쳐 지나갔다.

"You said laminate?  I misheard. You know, I wondered that there is no refrigerater for laminade in the workroom."

우리는 한바탕 웃었고 나는 Workroom에 가서 코팅기 전원을 켜고 교실로 돌아왔다.

코팅기는 예열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리 전원을 켜 두어야 해서 Ms. K가 전원을 켜 놓아달라는 부탁을 한 것을 나는 레모네이드를 말하는 줄 알았다.




미국 학교에서 일하면서 나는 셀 수 없이 이것과 유사한 경험을 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비슷한 실수를 할 때가 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있다가 뜬금없이 귀에 꽂히는 미국인들의 영어를 듣다 보면 그 단어의 발음을 잘못 이해하는 실수를 하게 되곤 한다.

코팅이라든지 복사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면 그 기기를 코팅기라 불러온 나였을지라도 laminate 란 단어를 몰랐을 망정 나의 특기인 '대화의 맥락을 통해 이해하기' 기술을 활용하여 그것을 lemonade로 잘못 듣는 일은 없었을 텐데, 뜬금없이 들려오는 그 단어는 정말 lemonade로 들렸다.


미국에 온 지 9년 차가 되고 있었지만 머리와 혀가 이미 굳을 대로 굳은 내 나이를 대략적으로 아는 동료들은 내 영어 발음치적인 실수의 이유와 배경을 알고 나의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준다.

그리고 나의 그런 실수들은 가끔 농담거리로 회자되곤 한다.




처음 미국 학교에서 일을 시작할 때는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 실수를 하거나 내 영어의 부족함이 문제가 될까 봐 누군가 말을 하면 긴장하며 귀를 곤두세우곤 했다.

하지만 "나는 한국말 하나도 못하는데 네 영어는 훌륭하다"라든지 나의 실수에 대해 "그거 별거 아이야, 너(그런 실수를 한) 정말 귀엽다."라며 웃는 동료들 덕분에 나는 내 영어가 부족한 것이 불편하지만 부끄럽지는 않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내가 먼저 인지하게 되면 나는 얼른 내 실수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실수를 바로잡곤 한다. 

그런 경우, 어떤 동료들은 "정말 그렇구나. 헷갈릴만하네." 라며 원어민이기 때문에 전혀 깨닫지 못한 발음의 유사성이나 미국인들의 언어습관의 문제를 나를 통해 발견하며 신기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료들은 내 영어의 부족을 지적하기보다 자신들의 언어인 영어가 온갖 잡다한 언어가 섞여 규칙도 엉망이고 배우기 어려운 언어임이 사실이라며 격려해주기도 한다. 

나의 영어 발음치를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격려해주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미국인 동료들에게 레모네이드와 코팅기인 laminate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단어였으나 영어 발음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영어 발음치인 내 덕분에 그들은 누군가는 그 두 가지 영어 단어가 혼동될 수 있을 만큼 매우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이 일을 통해 평생 코팅기라고 불렀던 laminate라는 기기의 명칭과 정확한 발음을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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