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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Jan 04. 2020

이름을 외우는 것이 나를 그들 속에 존재하게 만든다

서툰 영어로 미국 학교에서 일하는 한국 아줌마의 미국 학교 생존기


생존 영어로 미국 학교의 특수학급에서 보조 교사로 일하고 있는 한국 아줌마가 

미국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생존의 기술, 그리고 그 몸부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국인들에게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인 듯하다.

미국인들에게 이름을 부르는 일은 배가 고프면 무엇인가를 먹는 것처럼 당연한 일인 듯하다.

이름 외우기에 젬병인 한국 아줌마는 그런 미국인들 사이에서 꼬부랑 이름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상대방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이자 일상적인 일인 것 같다.

미국인들은 사적인 관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공적인 관계에서도 상대방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름을 부른다.


미국 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하고서 가장 난처했던 것이 같이 일하는 학교 직원을 불러 말을 해야 하는데 이름을 모르거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할 자신이 없었을 때였다.

워낙 이름 외는 것에 재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름을 외우지 않아도 지장이 없는 한국문화에 길들여진 탓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미국 이름들은 보고 읽는 것도 어렵거니와 한 번 듣고 발음을 기억하기도 뻣뻣한 내 혀로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들이 허다하다.


특수학급 보조교사를 시작한 첫해, 담임교사를 "Ms.**"라고 불러야 하는데 전형적인 독일식 성인 그 이름을 종이에 적어서 여러 번 읽어도 그 발음이 도대체 입에 붙지를  않았다. 

발음도 어려운 이름을 어설프게 불렀는데 틀리면 괜히 담임교사 마음이 상할까 싶어서 할 말이 있으면 눈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거나 "Excuse me, "라고 부른 후 용건을 이야기하면서 가능하면 이름을 불는 경우를 피하려고 애를 썼다.

두 달쯤 지난 후, 속으로 미리 몇 번 발음을 해본 후에는 어느 정도 정확한 이름을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기는 했지만 처음 시작한 미국 학교에 적응하기도 힘든데 하루 종일 같은 교실에서 일하는 담임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난처해지곤 했다.




너 나할 것 없이 서로의 이름으로 아침 인사를 시작하고, 할 말이 있으면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시작하는 미국 학교에서 일하면서 여전히 부담스러운 과제가 동료들의 이름을 외워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이다.


미국 초등학교에서는 교사들 뿐 아니라 교장과 교감 심지어 행정실 직원들까지 대부분 전교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교사들이 자기 반이 아닌 아이들의 아이들 이름까지 기억하고 지나다 용건이 있으면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물론 100% 다 기억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 두 번 이름을 들으면 기억하여 다음번에 그 아이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동료들을 보며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보조교사들끼리 함께 하는 자리에서도 어떤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면 자기가 맡은 아이가 아님에도 그 아이 이름을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들의 경우 이름을 불러서 지적하는 것이 그냥 "Hey"나 "Kid"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에 이름을 부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런 교육적 차원을 떠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인 듯하다. 학 학생들이나 학부모들도 교장, 교감은 물론이고 교사와 학교 직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름으로 부른다.

물론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사들의 First Name을 부르도록 하지 않기 때문에 Mr. 나 Mrs. 에 성을 붙여 부르지만 그것은 학생들이 교사와 직원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은 교정에서 교장이나 교감을 마주치거나 사무실에 가서 직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도 학부모나 아이들도  "Hello, Mr. **." 하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 인사를 한 후 용건을 말한다.


쉬는 시간에 놀이터를 지키다 보면 우리 반이 아닌 다른 반 아이들도 어디선가 내 이름을 주워듣거가 간혹 직접 물어본 후 기억했다가 말을 걸 때 꼭 내 이름을 부른다.

"Ms. P, 블라 블라 로리가 나를 때렸고 블라블라 나랑 안 놀아주고."

물론 이렇게 다른 아이를 고자질하는 말이 대부분이지만 대여섯 살짜리 아이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서 불러주는 것이 심지어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끔 만나는 안면이 있는 학부모들도 내 이름을 넣어 인사를 전한다.  

미국인들은 자라온 배경과 그들의 문화 덕분인지 미국인들은 이름 암기에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미국 학교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그들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많은 이들의 이름을 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재능과 이름을 부르는 문화에 맞춰 이름 외우기 능력을 갖추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문화에 빨리 뛰어들수록 그들의 일원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이름을 부르고 다가가면 동료들은 더 친근하고 다가오고 친밀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내가 한 말을 더 잘 기억해준다.

삼 년째 미국 학교에서 일하면서 그들의 이름 부르기 문화 속에서 적응하다 보니 예전보다는 이름을 외우는 능력이 향상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이름을 잘 못 기억한다. 

심지어 이사 와서 서로의 이름을 소개했는데도 오가다 만나면 웃으며 "Hello."라고 인사하는 옆집 아줌마 이름은 아직도 마리아인지 메리인지 잘 모르겠다. 

가끔 만나는 우리 아이 친구 엄마의 이름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는데 여전히 헷갈려서 미안할 때가 종종 있다.

게다가 발음에 자신이 없어서 망설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내가 매일 마주쳐야 하는 동료나 직원들의 이름은 필사적으로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이름을 부르며 친한 척 다가가며 살고 있다. 

'내가 네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란 걸 기억해'라는 의미의 웃음을 던지면서 말이다.

단순한 인사일지라도 그렇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던지는 짧은 대화에서 내가 그들의 무리에 속한 존재임을 서로가 자각하는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 엄청 예쁜 전형적인 미모의 백인 미술치료 교사가 있다. 그 교사의 이름이 그다지 어렵지 않음에도 머리에 각인이 되지 않아서 이름을 부르지 못해도 마주칠 때마다 웃으며 " Hi."라고만 인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성격 탓인지 아니면 내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건지 몰라서 그러는지 못 들은 척 지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정면으로 마주쳐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Hi." 대꾸하곤 했다. 

평소에도 냉소적인 표정을 하고 있어서 100% 의도적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을 바탕으로 볼 때, 누런 얼굴에 까만 머리, 영어 발음도 구린 나를 은근히 무시하는 것 같다고 느끼게 만들곤 했다.

올 초, 담임교사에서 두 번이나 물어서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주칠 때마다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으나 그녀의 다소 냉담하면서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여전했다.

그렇게 두어 달쯤 지났을 때 서로를 지나치면서 별 기대 없이 평소처럼 인사를 건네었는데 갑자기  "Hi, Ms. P." 하며 내 이름을 부르고 인사를 하더니 우리 반 어떤 아이에게 대해 묻는 것이었다.

그녀의 냉담함이 태생적인 것이라 생각하며 지냈지만 그녀의 입술을 통해 듣는 내 이름과 다정한 인사에 드디어 그녀와 동료가 된 것 같은 생각에 이상스레 기분이 좋았다. 

그 후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다른 교사들처럼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나름 노력을 하고 있지만 가끔은 내 눈에 쌍둥이처럼 보이는 미국 아이들의 생김새와 다양한 이름 그리고 특이한 발음은 나의 기억에 큰 장애가 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 반 아이들이 통합 수업을 위해 가는 학급의 눈에 띄는 아이들이나 놀이터에서 주변을 얼쩡거리는 아이들의 이름은 열심히 기억하려 노력한다. 

물론 여전히 통합 수업 반 전체 아이들의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한 거나 나에게 말을 거는 다른 반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해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교사가 아닌 미약한 지위의 서툰 영어를 하는 보조교사인 내 말일지라도 아이들에게 내 잔소리가 먹히도록 하기 위한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다른 영어권 국가들도 비슷한 분위기이겠지만, 미국인들과 함께 일하는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동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다.

내가 먼저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면 그들 또한 내 이름을 기억해주고, 나를 그들 속의 존재로 더 빨리 받아들여주는 것을 경험한다.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 동료를 갖게 되고 동료가 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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