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서관에서 발견한 한국 책 읽기
한국 도서 코서에서 책의 옆구리에 적힌 제목을 후루룩 훑으며 빌릴 책을 고르는데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다.
"아내가 결혼했다"
'아내가 결혼했다고? 근데...... 뭐지 이 익숙한 느낌은?'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이 소설책과 같은 제목의 드라마나 영화를 본 것 같은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책을 빌려와서 검색을 해보니 여전히 눈부신 눈웃음을 가진 애교 만점의 여주인공으로 왕성한 활동 중인 손예진과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김주혁, 두 배우가 주연한 영화였다.
2008년 영화 개봉 당시에는 파격적인 제목뿐 아니라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 때문에 상당히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개봉한 지 꽤 시간이 지난 후 어디선가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미국 도서관에서 오래전 여러모로 화제가 될 만큼 파격적인 원작 소설을 만나기 전까지 그 영화와 관련된 구설수도, 동명 소설의 원작이 있음도 몰랐다.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 문이당, 2006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제목에 생뚱맞게 축구공이 그려진 겉표지를 보고 조금 웃음이 났는데, 축구공을 그려 넣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2002년 월드컵 전까지는 한일전 외에는 축구를 관람한 적이 없을 정도로 나는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니 소설의 1/3은 차지하는 것 같은 축구와 관련된 내용을 읽어야 할 때마다 나는 이 책이 소설책인지 축구와 축구선수에 대한 전문 서적인지 헷갈렸다.
그 정도로 이 소설은 시작부터 이야기의 구석구석에 축구가 연결되어 있다.
"아내가 결혼했었다."도 아니고 "아내가 결혼할 것이다"도 아니고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제목처럼 소설은 재혼 이야기나 이혼 이야기가 아닌 한 남자와 결혼한 여자가 결혼 생활 도중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이야기이다.
회사 일로 만난 인아에게 끌렸던 덕훈은 결혼을 기피하는 인아를 구슬리고 설득하여 결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일 때문에 주말부부 생활을 하던 중 인아는 다른 남자, 재경과 사랑에 빠져 그와도 결혼하겠다고 선언을 한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지만 덕훈도 여전히 사랑하므로 그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인아의 얼토당토않은 논리에 덕훈은 번민과 고통에 빠진다.
그래서 남편을 둘이나 두겠다고? 그 남자도 그렇게 하는 거에 동의했어?
내 머리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맞바람이라도 피워야 하는 것인가?... 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겪고 있는 이 혼란을 아내가 깨달을 수 있을까?
동시에 두 남자의 아내가 되려는 인아가 폴리 안드리, 폴리 가미, 폴리 기니 같은 어려운 용어도 술술 늘어놓으면서 어찌나 자기 딴에는 논리적이고 조리 있게 말을 잘하는지, 어처구니없는 억지가 인아의 생각과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싶어 졌다.
결국 다른 남자와 또 결혼을 하겠다는 아내 인아에게 주인공 덕훈뿐 아니라 소설을 읽는 동안 나 조차도 설득당했다.
세상은 워낙에 넓으니까 내가 살 수 있는 아주 조그만 모퉁이쯤은 있을 거야. 당신이 조금만 이해해 줘.
결국은 누구의 딸인지 모를 아이를 위해 아내의 또 다른 남편과 함께 넷이 이층 집에 사는 이상한 꿈을 꾸며 뉴질랜드행을 계획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렵지만 신기한 축구 이야기와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매우 파격적인 결혼 이야기는 마치 스포츠 기사 사이사이에 온갖 스캔들이 버무려진, 오래전에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면 가끔 의자 뒤편에 끼워져 있곤 하던 선정적인 스포츠 신문을 읽은 기분이었다.
박현욱 작가는 아내가 결혼할 수 있다는 매우 엉뚱하고 별난 이야기를 통해 보편타당한 것들이 어려운 이들과 우리 사회의 상식과 관념을 뛰어넘는 이들의 인생, 그들 나름의 이유와 고민 그리고 그들의 선택을 덕훈과 인아 그리고 재훈의 생각과 마음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작가 스스로 판타지라고 말한 그의 엉뚱한 발상이 담긴 이 책은 그에게 제2회 세계 문학상에서 대상을 안겨주었다.
사실 남편을 둘 가진 아내의 자극적인 이야기보다 축구를 몰라도 이해가 되게끔 인아와 덕훈의 인생을 축구의 역사나 축구 선수들과 버무리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간 그의 탁월한 재능 덕분에 상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영화는 손예진의 눈부신 눈웃음과 순수한 느낌을 백배 활용하여 그녀의 사랑스러운 표정과 애교 가득한 몸짓으로 매력이 넘치는 인아를 보여준다.
소설의 기본 줄거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시작부터 그리고 영화 곳곳에서 소설보다 좀 더 극적이고 영화스러운 장면이 연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숨이 긴 소설과 달리 제한된 시간에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영화의 특성으로 고려해서 봐야 할 것 같다.
사실 영화에서는 인아가 손예진이라서 "아내가 결혼했다"는 이야기 전개가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내가 별을 따달래, 달을 따달래, 그냥 남편 하나 더 갖겠다는 것뿐인데.....
손예진이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이런 대사를 읊는다.
다소 어리숙하면서도 소설에서 보다는 과감한 행동력을 보여준 김주혁이 맡은 덕훈은 발버둥을 치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결혼 생활에 대해 반항을 했음에도, 결국 아내를 다른 남자와 나누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어쩐지 영화 속 덕훈뿐 아니라 그의 선택에게 공감하게 되는 관객들은 손예진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애교에 그냥 설득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덕훈의 뉴질랜드행에 대한 상상으로 끝을 맺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네 사람이 함께 살기로 작정을 한 덕훈이 재경과 함께 아이와 인아가 있는 스페인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소설은 현실일 수 없는 그리고 현실이라면 몹시도 불편하고 매우 많은 문제를 지닌, 작가의 말처럼 판타지 같은 이야기이다.
지구 상에 어떤 나라는 여전히 여러 남편이나 여러 아내를 합법적으로 거느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 가정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남편과 아내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공상 속 이야기이기 때문에 인아도 두 남편을 가질 엄두를 낸 것이리라.
때문에 영화에서도 두 아빠와 한 엄마 사이에서 폴짝거리는 아이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들이 말이다.
살아보니 남편은 하나면 충분하다.
나 같은 사람은 하나인 남편과 사이좋게 사는 것도 가끔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 사회의 상식이 일부일처제인 모노 가미라 나에게 참 다행스럽다.
얼마 전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고 현재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사랑의 불시착"을 보게 되었다.
북한을 배경으로 한 탓인지 아니면 그냥 재미가 있기 때문인지 주변의 미국인들도 여럿 이 드라마를 시청했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김주혁의 혼을 빼놨던 손예진은 "사랑의 불시착"에서도 북한 남자 리정혁을 연기한 현빈의 혼을 쏙 빼놓은 윤세리로 열연했다.
십이 년이 지났건만 "아내가 결혼했다" 때보다 더 애교스럽고 더 사랑스러운 데다가 우아해지기까지 한 손예진과 보고 있으면 마냥 흐뭇한 현빈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소설 속 인아 덕분에 상당히 전문적인 용어를 알게 되었다.
굳이 알아둘 필요까지는 없는 말들이지만 이런 용어도 있구나 싶어서 찾아봤다.
모노 가미 : 일부일처제
폴리아모리 : 다자간 사랑, 집단 혼 관계를 형성
폴리 안드리 : 복혼
폴리 가미: 일처다부제
폴리 기니: 일부다처제
폴리들은 말도 어렵고 이렇게 사는 것도 어렵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