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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Aug 28. 2018

우물 밖 개구리로 사는 법

우물 안 하늘은 그만큼, 우물 밖 하늘은 이~만큼

우물 안을 너무너무 좋아했던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온 뒤,

우물 밖에서 보는 넓은 하늘의 가치를 깨닫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우물 안에서 보이는 만큼의 하늘을 보며 사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자신의 몸 크기만큼 자그마한 우물에서 올려보던 그 작은 한 하늘이 전부인 줄 알고 살지만, 나이를 먹고 자라면서 점점 우물이 커지고 그 우물에서 보이는 하늘도 넓어져간다.  


우물 안에서 보이는 하늘은 내가 살고 있는 우물, 딱 그만큼이다.


하지만 우물이 아무리 커져도 그 안에만 있으면 우물 밖에 내 눈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을 만큼 큰 하늘이 있음을 깨닫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물론 요즘은 워낙 인터넷과 SNS가 발달되어서 우물 안에서도 우물 밖으로 나간 것만큼 넓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으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늘 그런 이들의 삶을 동경했고, 그들의 앎과 삶에 감탄하고는 했다.  


나는 전혀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들처럼 우물 밖으로 껑충 뛰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우물에서 보이는 하늘이 전부라고만 생각하며 사는 삶이 불편하지 않았다. 우물 벽을 기어올라 밖으로 뛰쳐나갈 만큼의 호기심도 용기도 없는 우물 안의 삶이면 나에게는 충분했다.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작은 하늘과 내 다리로 뛰어다니기에 적당한 우물 안이 행복했고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이라는 나라도 나에게는 너무 넓었고, 같은 나라 사람임에도 새롭게 만나는 한국 사람들이 나에게는 여전히 낯설었다.  그 안에서 팔딱거리며 살기에도 힘에 부쳐서 나이를 먹을수록 손톱만큼씩 내 우물이 넓어지는 게 그다지 기쁘지 않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에서 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등에 업혀 나갔던 우물 밖은 진짜 우물 밖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보호자인 부모님의 우물 안에 있었으니까.


그리나 결혼 후, 남편의 파견근무로 갔던 중국에서의 삶과 지금 미국에서의 삶은 진짜 우물 밖을 경험하는 삶이었다. 우물 밖에서의 삶은 우물 안에서는 내가 기대해본 적도 없는,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넓고 광활한 하늘을 보게 해 주었다. 가끔은 그 큰 하늘을 바라보기에는 내 시야가 너무 좁고, 그 하늘 아래 사는 것이 어깨가 시큰거리도록 묵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덕분에 내 눈은 전보다 한 뼘, 어쩌면 한 걸음 더 멀리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고, 그 묵직하던 무게를 한 손으로 꺼뜬히 들 수 있는 내공을 갖게 되었다.



우물 밖으로 나온 후 마주하게 된 하늘은 날마다 더 커지는 것 같다.


그리고 우물 안에서의 삶이면 충분했던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의 내가 안타깝게 여겨지게 되었다. 더 멀리 보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있느라 다리에 쥐가 나기도 하고, 어깨를 누르는 짐을 감당하는 것이 힘이 부칠 때도 있지만, 다리에 쥐가 나거나 힘에 부쳐 가쁜 숨이 나오는 그 과정은 그만큼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우물 안 개구리로 살던 시절, 과감하게 우물 밖으로 뛰어나오는 개구리였다면 지금보다 두 걸음 아니 어쩌면 열 걸음쯤은 더 멀리 볼 수 있고, 지금보다 열 배는 더 무거운 짐도 거뜬히 감당하는 힘센 개구리가 되어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벌써 저만큼 뛰어갔어도 늘  뭔가가 고픈 우물 밖 개구리보다는 이만큼 온 것에도 만족하며 사는 개구리로 사는 것이 더 행복할 테니. 내가 우물 밖으로 뛰어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오늘 한 발짝 뛰었고, 내일 한 발짝 더 뛰어갈 수 있음에 충분히 감사하다.


내일도 한 발짝 더 뛰어가는 개구리가 되고 싶다.




나에게 우물은

내가 살던 대한민국 땅이기도 했고, 한국인으로만 이루어진 인간관계이기도 했다.

내 앞에 보이는 것과 내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인, 라면 상자 크기의 경험이었다.

내가 배워온 것과 내가 경험한 것만이 진리로 착각되는 단단한 벽이었다.   

내가 정한 가치와 기준, 살면서 덧입혀진 선입견과 편견의 두터운 문이었다.


나에게 우물 밖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과 내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

내가 배워온 것과 내가 경험한 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삶의 반성,

내가 정한 가치와 기준, 선입견과 편견이 틀렸을 수 있다는 스스로의 성찰이다.


우물 밖으로 나온 나는

내가 관계 맺어본 적 없는 다른 종류의,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고

매일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소리를 들으며

어제와 다른 삶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날마다 내 선입견과 편견을 깨는 새로운 가치와 기준을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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