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마다 소풍 Feb 17. 2021

나를 웃게 하는 직장 동료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직장이 따뜻해진다.


생존 영어로 미국 학교의 특수학급에서 보조 교사로 일하고 있는 한국 아줌마가

미국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생존의 기술, 그리고 그 몸부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특수학급 보조교사로 일하는 미국 공립학교에는 특별한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나를 화장실에서 웃게 만드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일이 힘들다고 불평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월요일이 되었다.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서면서 어느 칸으로 들어갈까 잠시 생각한 후 제일 끝 칸에 들어갔다. 이번 주는 이 칸부터 시작해볼 생각이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화장실 문을 닫으며 문에 붙어있는 금주의 화장실 유머에 킥킥 웃고 나서 시원하게 용변을 보고 나왔다. 다음 칸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지 궁금하지만 그 즐거움을 다음 화장실 방문 때 누리기로 하고 교실로 돌아갔다.

우리 학교에는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새로운 유머 문구가 담긴 종이를 직원 화장실 문 안 쪽에 붙여놓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월요일이면 어떤 재미있는 것이 기다리고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화장실에 가곤 한다. 출근 첫 주에는 늘 붙어있는 종이인 줄 알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니 매주 월요일 아침 종이가 바뀌었다. 그 후 월요일이면 순서를 정해서 화장실에 들어가 각 칸에 붙어있는 유머를 즐긴다. 4칸짜리 화장실을 하루에 다 들를 수 없기 때문에 나머지는 다음날의 즐거움으로 남겨둔다. 간혹 아직 못 본 유머 종이가 붙어있는 화장실을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는 경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정서가 다른 탓인지 가끔은 미국식 유머를 이해하지 못해 어떤 뜻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날도 있지만, 화장실의 유머를 읽으며 어떤 때는 혼자 킥킥거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웃음을 빵 터뜨리기도 한다. 가끔은 화장실에 붙은 유머를 회자하며 우리 반 동료들과 함께 웃기도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화장실의 유머가 담긴 종이를 매주 교체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여러 동료들에게 물어봤건만 알면서 안 알려주는 건지 진짜 다들 모르는 건지, 화장실 유머를 담당하는 이의  아직도 나에게 미지의 인물이다. 남몰래 화장실 유머를 담당하는 비밀 동료 덕분에 주말 후 출근이 우울해지는 Blue Monday에도 출근이 기다려진다. 아이들 틈에서 시달리다 잠깐 화장실에 들르는 일이 즐겁다. 화장실은 용변만 시원하게 해소해주는 곳이 아니라 나의 기분까지 전환시켜주는 장소가 된다.


금주의 화장실 유머, 볼 수록 웃음이 난다.


우리 학교의 Supervisor 수잔은 얼마 전 30년 근속상을 수상했다. 30년 동안 우리 교육구의 Supervisor (감독관)으로 일했다는 뜻이다. Supervisor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점심 먹는 Lunch Table과 운동장을 감독하며 아이들의 안전과 질서를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수잔은 등하교 시간의 교통안전 도우미로도 일하기 때문에 제일 이른 아침 출근해서 교통안전 지도를 하고 모두가 하교할 때까지 횡단보도를 지킨다. 교통안전 도우미와 감독관으로 일하는 수잔은 할 일이 없는 시간이면 Lunch Table과 의자를 닦고 학교 운동장을 쓴다.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서도 수잔은 한순간도 열정적이지 않은 적이 없다.

아이들을 데리고 또는 여러 가지 잡무로 학교를 지나다 보면 수잔과 마주치지 않는 때가 없다. 가끔은 짜증과 피로에 지쳐 교내를 지나가다가도 빼빼 마른 할머니가 열심히 비질을 하다가 손을 흔들고 삐쩍 마른 손목으로 점심 테이블을 닦다가 씩씩하게 인사를 하는데 같이 손을 흔들며 씩씩하게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들 때문에 속을 부글부글 끓이며 걷다가도 자그마한 키로 온갖 학교 잡일을 하는 수잔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커다란 미소를 지으면 속 없는 사람처럼 함께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수잔을 보면 아이들 때문에 진이 빠졌어도 힘들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지쳐서 한숨을 쉬며 학교를 지나가도 수잔과 마주치면 미소를 짓게 된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넘어서서 필요하지만 누구도 하지 않은 영역까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 같이 일을 찾아서 해내는 수잔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은 내가 출근하기도 전부터 학교 일을 돌보고 학교가 빌 때까지 학교를 지키는 수잔에게 '집에 안 가고 학교에서 사는 거 같다'라고 농담을 던지자 작은 몸을 흔들며 깔깔 웃었다. 자기는 학교 강당에서 살고 매일 밤 침낭에서 잔다고 명랑하게 대답을 던진 후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게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수잔의 모습에서 어떤 일을 하든 온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일하는 사람의 품위가 느껴졌다.




어느 직장이든 시키는 것도 안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키지도 않은 것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야 할 일을 넘어서 더 많은 것을, 맡겨지지 않는 일까지 찾아서 하는, 함께 일하는 것이 즐거운 이들 말이다. 오늘도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 고마운 동료들 덕분에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 영어에 도전장을 내밀고 용감하게 시작한 일이지만,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찾아오고 매일 비슷한 말썽과 문제들로 진을 빼는 아이들이 있음에도 꾀부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숨어있는 특별한 동료들 덕분이다. 그들을 보며 나도 함께 일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된다.




내가 일하는 미국 공립학교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유머가 담긴 짧은 글로 화장실에 들른 이들의 기분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미지의 동료가 있다.

누가 특별히 알아주는 일이 아님에도 구석구석에서 전심으로 일하는 동료가 있다.
이 특별한 사람들 덕분에 내가 일하는 곳은 참 따뜻하고 훈훈하다.

힘들고 지치는 순간에도 그들 덕분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오늘도 그들로 인해 웃으며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나도 그런 특별한 사람이 되어봐야겠다는 꿈을 꾸어본다.




이전 19화 미국 학교의 신기한 교장 선생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