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해주세요.
꼭 이해를 해야 할까?
항상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려는 강박에 시달리며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이해하려 애쓰니까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때는,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너는 그럴 수 있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것이면 충분히 괜찮을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불평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 비난에 사용하는
“거~ 참, 이해가 안 되네.” “너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말에는
“이해”하려 애쓰고 노력했는데 “이해”가 안 되더라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실제 생활에서 애씀도 없이, 노력을 해보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니까”
이해해주고 싶지 않은 사람에 대해 “나는 네가 왜 그런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해 왔다.
나는 이해할 만한 도량의 사람인데, 이해하기에 충분한 너른 마음의 소유자인데
어떤 상황이 또는 네가 나를 이해 못하게 만든다며 책임을 그 상황이나 상대방에게 전가시키면서
내 체면과 면목을 세우는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불리해지는 상황이 되면 “왜 나를 이해 못해?”라는 반문을 통해
나는 이해받기에 충분한 사람인데, 나를 이해 못하는 것을 상대의 잘못으로 치부하면서
내 자존심과 자부심을 지키는 얄팍한 수작을 이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이해”라는 말을 너무나 자주 쉽게 가볍게 사용하지만,
전혀 이해하려 애쓰거나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냥 “그것이 싫다.”, “네가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라고 하면 이해심도 아량도 없는 독선적이고 편협한 사람으로 치부될까 봐 두려워서
“이해”라는 말을 빌어 나를 포장해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순간 “이해”라는 말의 무게와 깊이는 내가 마구 사용하는 그런 가볍고 쉬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살펴보니 “이해(理解)”는
‘(1)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하다 (2) 깨달아 알다.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이다’라는 뜻을 가졌으며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인다는 “양해(諒解)”라는 동의어가 있다.
“이해”는 사리를 분별하려는 노력과 너그러이 받아들이려는 과정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싫은 것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분별하려는 노력과 너그러이 받아들이려는 마음도 없이
“이해할 수 없다” 불평했던 과거의 시간과 비난과 비판을 쏟아부었던 사람들에게
내 편협했던 생각과 교만했던 마음을 고백한다.
나는 애쓰지도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왜 나를 이해 못하냐”며
상대에게 나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라고 강요했던 태도를 반성한다.
이제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에는 정직하게 “싫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이해해야 할 것에는 사리를 분별하고 너그러이 받아들여주는 애씀과 노력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어떤 점에 문제가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겸손을 소유한 내가 되면 좋겠다.
그러나 살다 보니
예전에는 이해가 안 된다고 고집했던 일이 그냥 받아들여질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을 그냥 안아주고 싶고, 그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은 때가 있다.
“이해”를 넘어서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선한 마음으로, 나에게 그들의 곁을 주는 것에 고마움으로
“이해”와 상관없이 그냥 “그래도 괜찮은” 것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다행이다.
이해하고 이해를 구하는 그 분별과 해석, 깨달아가는 긴 과정 없이
“그냥 그런 것이구나.” “그래, 그럴 수도 있구나.” 그리 넘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어서.
이 해(年)를 넘기면 그래도 괜찮은 일이 더 많아지기를.
그냥 흘러가게 두어도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여유롭게 받아들이게 되기를.
“이해가 안 되네.”, “너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말 대신
“그래, 그렇구나”, “너는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말을 더 많이 하는 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