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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Dec 30. 2018

영어 발음치의 한글자랑

미국에서 영어 발음치로 살면서 깨달은 한글의 위대함

미국에 가면 영어가 술술 될 거라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살면서 깨닫게 된 것은 영어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것이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영어의 산을 넘어서는 것은 힘든 일이라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솔직히 미국에서 사는 세월이 늘어가도 여전히 제자리인, 누가 미국에서 몇 년 살았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쑥스러운 내 영어의 수준이 좀 부끄럽다.

특히 영어 발음의 문제는 나에게 그야말로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과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해외 연수나 유학을 해본 적이 없이 한국의 교과서 영어만 했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영어 발음의 넘사벽을 만날 때마다 사실 좀 부끄러워진다.


미국에 살면서 서투른 발음으로 어설픈 영어를 하면서 창피를 당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심지어 지금은 3번 방에 사는 다섯 살짜리 꼬마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 이름을 제대로 발음 못해서 그 꼬마에게 지적을 받고 있는 처지이다.

그럴 때면 혼자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한다.

내가 혹시 영어 발음치가 아닐까?

영어 발음치로 태어나 영어 발음을 구분할 수 없어서 제대로 발음을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필요한 것이 있어서 급히 동네 마켓에 간 일이 있었다.

Basil(바질)을 사기 위해 야채 코너를 둘러보는데 바질이 보이지 않았다.

미국 초보여서 영어로 말을 거는 것이 살짝 겁이 났지만 미국에서 건너온 채소이니 나는 바질이 미국 이름일 거라 생각하면서 지나가는 직원에게 바질(Basil)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직원이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나는 혀를 굴려 "바지일~"이라고 했지만 그 직원은 모르겠단다. 그러더니 옆에 지나가던 다른 직원을 불러 물었다.

조급하고 부끄러워진 나는 그것이 Herb(허브)의 일종이라고 했다. 두 직원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허브가 뭐냐고 했다. 혀를 굴리며 "허얼브"고 해도 못 알아듣더니 급기야 없다는 것이다.

그때 지나가던 어떤 여자가 [얼브]를 말하는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 직원들은 “아하~”하더니 나를 허브 코너로 데려갔고 나는 Basil이라는 라벨이 붙은 바질 한 묶음을 얼른 집어 들고 마켓을 나왔다.


그 날 그 지나가는 여자 덕분에 우리가 허브라고 부르는 Herb의 ‘H’는 묵음으로 [얼브]라 발음해야 하는 것을 배웠고,  그 후에 Basil은 [베이즐]이라고 발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모임에서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나의 불쌍하고 한심한 영어 실력을 고백했던 날, 한 분이 20년 전 미국에 유학 와서 겪은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분은 바닐라 셰이크를 무척 좋아했단다. 미국에 와서 미쿡스런 Vanilla Shake(바닐라 셰이크)를 먹겠다고 햄버거 집에 가서 주문을 하는데 직원이 못 알아듣기에 "바니일라 쉐에이크" 라며 있는 대로 혀를 꼬부려 말했는데 그래도 못 알아듣더라는 것이다.

뒤에 줄을 선 미국인들이 자기 뒤통수를 째려보는 것 같고 직원은 그분의 혀 꼬부라진 소리에 질력이 나는 것 같아서 말했다고 한다. “스트로베리 쉐이크 (Strawberry Shake), Please.”

그랬더니 단번에 알아듣고 번호표를 주더라는 것이다. 그분은 그 트라우마로 인해 몇 년을 먹고 싶은 바닐라 셰이크 대신 스트로베리 셰이크를 먹었다고 했다.


한 번은 영어를 전공한 미국인에게 Herb [얼브] 발음 실수를 이야기하며 영어 발음이 너무 어렵다고 하니, 그 사람은 웃으면서 영국에서는 [허브]라고 발음을 한다면서 미국인들이 이상한 것이라고 농담을 하였다.



내 친구 중에 Susan과 Suzanne이 있다.

미국 사람들은 두 발음이 다르다며 다르게 발음하는데 내가 듣기에는 그냥 [수잔]이다.

하필 두 친구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난감해진다.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Susan(수잔)과 Suzanne(수잔)은 다 알아듣는데 내가 [수잔]을 부르면 둘 다 같이 나를 쳐다본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내가 부르고 싶은 [수잔]을 손으로 살짝 툭 치면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아는 사람 중에 Kuehn이라는 사람이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이 [쿤]인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먼저 자기 이름이 [킨]이라고 해서 다행히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이름을 본 사람마다 나에게 Kuehn을 뭐라고 부르냐고 물어본다.

미국 사람이 한국인인 나에게 미국 사람  이름 Kuehn을 뭐하고 발음하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한 번은 아들 친구들이 놀러 왔기에 Branden이라는 애를 [브랜든]이라고 불렀더니 자기 이름은 Brandon이 아니라 Branden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둘 다 [브랜든] 같은데 O와  E는 발음이 다른 브랜든이란다. 브랜ㄷ’ㅡ+ㅓ’ㄴ이라고 발음하는 것도 같다.

Branden을 브랜덴으로 Brandon은 브랜돈으로 모음의 정해진 소리로 항상 같은 발음을 사용한다면 쉬울 것을……

아직도 나는 두 이름의 발음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정말 영어 발음치인 걸까?


학교에서 놀이 시간에 3번 방 아이들 중 하나인 마키가 어제 놀던 악기를 가지고 놀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그 악기가 Xylophone (실로폰)인 것을 알아서 Ms. K에게 [실로폰]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나는 분명 Phone을 [foʊn]으로 발음했다. 그런데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다시 [silofoʊn]이라고 발음을 했건만 못 알아듣더니 마키가 어제 놀던 거라고 하자 [zaɪləfoʊn]이라며 꺼내 주었다. Xylophone 은 [실로폰]이 아니라 [자일로폰]이었다.

그야말로 OMG! 영어를 중학교 때부터 10년을 배웠는데 실로폰 하나 발음을 못하는 처지라니…

너무 부끄럽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깨닫게 된 것 한 가지가 한글의 위대함이다.

누가, 왜 그렇게 정했는지 몰라도 제멋대로, 내 맘대로의 셀 수 없는 예외의  규칙을 가진 영어 발음 때문에 실수를 하면 할수록 보이는 글자 그대로 읽으면 되는 한글의 단순하고 쉬운 발음 규칙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런 위대하고 대단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님께 고마울 따름이다.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이 아직 한국말은 잘못해도 읽거나 쓰기는 쉽게 배우는 이유도 한국의 자음과 모음은 정해진 소리 그대로 정직하게 발음이 되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약간의 예외의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제멋대로, 네 맘대로 인 영어 발음에 비교하면 한글은 너무도 친절한 소리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일본어는 300개, 중국어는 400개의 발음만을 표기할 수 있지만 한글은 표준어 자음 19개와 표준어 모음 21로 11,000개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자라고 한다.

덕분에 한글은 UN이 문자 없는 나라들에게 제공하는 문자로 지정되었고 현재 세 나라에서 한글을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는 글자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 글자의 소리이건 표준어 마흔 개의 자음과 모음으로 표기가 가능하니 그런가 보다.


자음과 모음이 가진 소리만 알면 누구나 같은 발음으로 읽을 수 있는 한글이 새삼 자랑스럽다.

사람의 이름을 잘못 읽어서 난처한 상황이나 물건의 발음을 제대로 못해서 부끄러운 상황을 절대로 겪지 않는 정직한 한글의 발음이 진심으로 대견스럽다.

그리고 그런 한글을 만들어 낸 세종대왕님, 만세 만세 만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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