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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Feb 12. 2020

육향과 잡내, 그 오묘한 시소게임

여의도 <화목 순대국>  방문기


수년 전, 처음 동여의도의 <화목 순대국>을 가게 된 것도 ‘순댓국 마니아’였던 당시 팀장님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댓국에 관한 한 소믈리에급 미각을 가진 분이 적극 추천했기에 의심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9호선 샛강역 근처 인도네시아 대사관 건너편 오래된 상가 건물 1층에 위치한 <화목 순대국>의 문을 열었을 때,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30년은 훌쩍 거슬러간 기분이었다. 예스러운 인테리어며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탁자와 식기구들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위기만으로도 이미 나 같은 조무래기는 무릎 꿇고 기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강렬한 포스다. 개업과 폐업이 무한 반복되는 요식업의 무덤, 여의도에서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는 자체로 존경받아 마땅한 곳이다.


주요 손님층은 팀장님 또래의 40~50대 중년 남성. 간간히 20대 청년이 왔고, 어쩌다 간혹 젊은 여성분들도 보인다. 이곳은 순댓국 뚝배기를 손바닥만 한 양은 쟁반째 서빙하는 게 특징이다. 빛의 속도로 나온 펄펄 끓는 순댓국에 숟가락을 푹 집어넣어 국물을 한입 떠먹었다. 그제야 왜 손님이 중년 남성 위주인지 알았다. 이곳의 음식은 [ 싸고, 빠르고, 맛있다 ]는 가성비를 따지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맛에 대해 평하자면 깔끔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호불호가 갈릴 맛이다. 간은 센 편이고 좋게 말해 육향이 진한 순댓국이다. 흔한 표현으로 잡내가 어느 정도 있는 순댓국이다. 돼지 곱창과 각종 부속, 순대가 넉넉하게 들어가 있다. 빨간 양념이 이미 풀어져 나온 국물은 색만큼이나 맛도 진하다. 칼칼한 국물과 푸짐한 돼지 부속들이 식도를 훑고 지나가면 뱃속이 뜨거워진다. 찬 겨울바람에, 냉혹한 현실에 꽁꽁 얼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녹는다.  


소위 예민한 후각과 미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음식 중 하나가 순댓국이다. 돼지의 머리에서 꼬리 끝까지 거의 모든 부위를 농축해 한 그릇에 담아낸 음식이기 때문에 비주얼도, 맛도, 향도 ‘돼지’ 그 자체다. 그래서 돼지한테 돼지 냄새가 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결벽증이라도 걸린 듯 돼지 자체의 향을 지우기에 급급하다. 인간한테 인간미 있다고 말하는 게 칭찬인 아이러니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답다 생각했다. 그래서 분명 돼지가 주재료인 음식인데도 돼지 특유의 맛과 향이 사라진 백지 같은 음식을 만날 때면 허탈함이 밀려온다. 그런 면에서 <화목 순대국>의 순댓국은 본연의 가치에 충실한 편이다.


지난해, 유느님의 단골집으로 방송에 소개된 후 젊은 층의 유입이 한결 많아졌다. 그들이 다녀간 후 SNS에 남긴 평을 보면 호불호가 확실히 갈린다. 불호의 이유는 대부분 ‘돼지 특유의 냄새가 강하다 ‘였다. 한참 그 평을 읽으면서 궁금해졌다. 세대가 바뀌고, 입맛이 급변하는 이 시대에 <화목 순대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진가를 제대로 느끼는 단골손님들을 위해 본연의 맛을 지켜야 할까? 아니면 생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유입해야 할 새 손님들의 입맛에 맞춰 서서히 순댓국의 맛을 요즘 스타일로 바꿔야 할까? 답이야 결국 사장님이 선택할 몫이지만 <화목 순대국>을 사랑하는 팬의 입장에서도 섣부르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어려운 문제다.


(부속을) 섞어서, 밥은 따로 주세요


내가 <화목 순대국>의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의자에 앉기도 전에 주문 방식이다. 마치 단골 바에 가서 바텐더에게 ‘늘 먹던 걸로!’라고 주문하는 그 바이브를 살려서 말한다. <화목 순대국>은 별도의 주문이 없으면 보통은 밥을 토렴해 국밥 형태로 나온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국물에 밥이 섞여 나오면 쌀이 품고 있던 녹말 성분이 국물에 녹아 돼지의 육향까지 빨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생선 비린내를 잡기 위해 조리 전 생선을 쌀뜨물에 담가 놓거나 헹군다는 요리 꿀팁을 보고 난 후 생긴 버릇이다. 전분질 성분이 비린내를 흡착해 제거해 준다는 원리가 육고기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지독한 문과형 인간의 조바심이다.  

 

육향을 가득 품은 순댓국으로 배를 채우고 <화목 순대국>의 문을 나설 때는 완전한 어른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기분이다. 겨우 순댓국 한 그릇을 먹었을 뿐인데 무슨 오버냐 혀를 끌끌 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향과 비주얼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범접하기 어려운 하드고어한 어른의 음식을 제대로 즐겼다는 만족감이 나 채우기 때문이다. 내 안의 어린이가 징징 거릴 때, 아무리 달래도 말을 들어 먹지 않을 때, 나는 여의도 <화목 순대국>으로 향한다. 돼지 부속으로 가득한 어른의 맛, 순댓국을 들이켠다. 그리고 끝없이 징징거리던 내 안의 어린이에게 말한다.


적당히 해라! 너도 먹을 만큼 먹었어.
순댓국도, 나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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