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May 25. 2021

언제부턴가 엄마, 아빠만 웃고 있다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관하여

  

알게 된 지는 10년도 넘었지만 SNS로만 간간이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분이 있다. 젊은 부부였던 그들은 어느새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었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던 아이는 사춘기 소년이 되었다. 부지런한 부모님을 둔 덕에 직접 만나지 않아도 유아에서 어린이, 다시 청소년이 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다. 머지않아 건장한 아빠의 덩치를 넘어설 소년. 여느 때처럼, 쑥쑥 자라는 소년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아래 부모의 코멘트가 달렸다.     


언제부턴가 엄마, 아빠만 웃고 있다.
이제 귀찮으신 듯... ㅋ      

별것도 아닌 일에 까르르 웃어 넘어가던 아이는 없다. 숨 쉬듯 들이대는 카메라가 귀찮고, 부모님의 한마디는 성가신 잔소리다. 이제 흔하디 흔한 사춘기 소년만 남았다. 마스크 속에 표정을 숨기고 있어도 알 수 있다. 웃음은 메말랐다. 여행을 왔건 말건, 사진을 찍건 말건, 스마트폰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3살까지 재롱떠는 것으로 평생 할 효도를 다 한다는 말이 있다. 부모는 3살 때까지의 예쁜 모습을 에너지 삼아 평생 자식을 키운다. 아마 소년의 부모도 고물고물한 시절의 소년을 추억하며 지금의 냉랭한 소년을 애써 이해할는지 모른다.        


웃음을 잃어버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고학년이 될수록 웃음은 빛의 속도로 사라진다. 단, 부모 앞에서만. 어버이날 즈음 가족 식사 때문에 만난 소년 또래의 조카가 그랬다. 수십 년 전 그 시절의 나도 그랬다. 부모의 품이 세상 전부인 줄 알던 아이는 커가면서 부모 이외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과의 시간보다 친구와의 시간이, 부모와의 대화보다 친구와의 수다가 더 소중해지는 시기가 된 거다. 서서히 부모와 내가 분리되는 시간이다.      


신발의 좌우를 구분하는 법부터 밤하늘의 달이 왜 나만 쫓아오는지까지... 부모는 모든 걸 알았고, 그걸 내게 가르쳐줬다. 아이는 부지런히 자란다. 부모가 보여준 세계의 크기보다 더 크고 짜릿한 세계를 경험하게 되면 이제 부모와의 시간이 시시해진다. 가족이라는, 자식이라는 의무감에 몸은 함께 있어도 정신과 생각이 저 멀리 떨어져 있곤 했다. 손 안의 스마트 폰 덕분에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함께 있어도 동떨어져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평생 나의 보호자였던 부모님. 그런데 언제부턴가 전세 역전이다. 병원, 공항, 호텔, 공공기관, 은행 등등 낯선 곳에 가면 내가 보호자가 된다. 난생처음 먹어 보는 음식부터 수도꼭지를 어느 쪽으로 돌려야 온수가 나오는지까지... 딱딱한 용어를 눈높이에 맞게 풀어 설명하고, 사용 방법을 시범 보인다. 꼬마였던 내게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자식과 부모라는 이름은 변함없지만 보호자의 위치는 달라진다.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흘러간다.      


소년의 부모가 적은 코멘트가 담긴 사진을 한참 봤다. 부모와 자식 그 중간에 있는 나. 부모의 마음도, 소년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소년과 그 부모의 모습에서 나와 부모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겹쳐 보였다.   

 



평소 사진 찍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부모님과 낯선 곳에 가면 세상 부지런한 사진사가 된다. 나중에 혹시라도 같이 찍은 사진 하나 없어 후회하지 않을까 싶어 시작한 일이다. 부모님 사진을 찍고, 포즈가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재빨리 카메라를 돌려 함께 셀카를 찍는다. 배경은 같지만 부모님 사진 한 장과 내가 함께 찍은 사진, 총 두 장이 탄생한다. 나이가 들수록 표정은 딱딱해지기 마련이다. 모니터를 위해 바로 방금 사진을 보여드린다. 그제야 부모님은 자신들의 표정이 어떤지 알게 된다.


자, 다시 한번!
표정 풀고 자연스럽게~
웃으세요! 하나, 둘....     


나의 포인트는 셋이 아닌 둘에 찍는 거다. 셋까지 가면 표정이 딱딱해지니까. 자연스러운 미소가 퍼지는 둘이 적당하다. 첫 사진보다 비교적 만족스러운 사진이 탄생한다. 함께 웃던 시절을 지나 언제부턴가 엄마, 아빠만 웃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후, 엄마도 아빠도 나도 웃지 않는 시절도 있었다. 모두가 웃음을 잃었던 시간을 지나 이제 아이처럼 웃는 엄마 아빠를 보면서 나도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지금은 셋이 함께 웃는 시절이다. 그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좀 더 부지런히, 자주 웃기 위해 자꾸 카메라를 들이민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정한 오지랖을 부려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