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Nov 26. 2021

내 돈 내고 혼나러 가는 곳

미용실과 병원의 기묘한 공통점


얼마 전, 뿌리 염색을 하러 미용실에 갔다. 수년째 머리를 맡기고 있는 미용사는 오늘의 시술을 마무리하며 신신당부했다.      


고객님. 아무리 바쁘고 귀찮아도 트리트먼트는 잊지 마세요.     


머리 감을 때마다 트리트먼트 하는데... 그렇게 엉망인가요?

     

샵에서 관리하는 것처럼 몇십 분씩 스팀 기계 써서 집중 케어할 수 없잖아요.     


그렇긴 하죠. 거의 바르자마자 3분도 못 견디고 씻어내니까.     


씻어내는 트리트먼트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야 낫기는 하지만...

근데 정 귀찮으시면 씻어내지 않고

물기 있는 상태에서 바르는 제품도 있어요.      


근데 제가 끈적이는 걸 싫어해서...     


절대 안 끈적여요. 지난번에 제가 발라 드렸던 제품 기억나시죠?      


지난번? 아... 기억이 난다. 바로 전에 머리를 손질할 때도 똑같은 순서의 대화를 나눴고, 이야기 마무리 무렵에 미용사는 손에 하얀 무스 거품을 듬뿍 짜낸 후 내 머리카락에 정성스레 발라줬다. 휘핑크림 같은 촘촘하고 하얀 거품이 까만 머리카락에 닿자 스르르 사라졌다. 그제야 고소한 우유냄새가 내 코끝에 닿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걱정에서 시작해 겁주기, 타이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과 달콤한 우유 향의 <노 워시 트리트먼트>를 발라주는 퍼포먼스까지... ’복붙‘한 듯 재생되는 이 상황에 살짝 웃음이 났다. 오래 본 손님을 걱정해 주는 자영업자의 따듯한 마음이자 시술의 성공확률과 직결되는 모질의 건강을 챙기려는 프로의 관리법이겠지? (물론 약간의 영업도 포함되어 있겠지?)      


걱정-> 겁주기-> 타이르기로 이어지는 패턴은 미용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내 돈 내고 혼나러 가는 곳은 또 있다. 바로 병원. 얼마를 기다렸건 내게 주어진 진료 시간은 5분도 안 될 그곳 말이다. 손바닥만 한 진료실에 들어선 내게 반질반질 윤이 나는 얼굴의 의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음... 젊은 사람 몸이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몸 안 챙기면 나중에 큰일 나요.     


증상이 뭐든 그들의 말은 틀에서 갓 나온 붕어빵처럼 똑같다.      


일단, 스트레스받지 마시고요.

밥 잘 먹고, 꼬박꼬박 운동하고, 잠 충분히 자면 나아요.

그리고 꼭 커피 줄이세요.


아... 하루에 커피 10잔씩 마시고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많아야 겨우 2잔 마시는데 ’ 커피 줄이라’는 의사의 말은 언제 들어도 억울하다. 물론 몇 잔이 아니라 한 잔이라도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몇 개 없는 스트레스 해소법인 커피 때문에 매번 듣는 저 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내 상황에 화딱지가 날 뿐이다. 밥, 잠, 운동 등 다른 건 더 잘 챙기기로 하고, 커피를 안 마시면 더 스트레스를 받을 거 같으니 정신 건강을 위해 일단 커피는 마시기로 한다.


스트레스를 받고 싶어서 받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나는 그저 순두부 멘털의 소유자여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도 받아지는 성향일 뿐이다. 걱정으로 시작해 겁주기, 타이름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미용실과 다르지 않았다. 너의 게으름 혹은 무심함이 머지않아 지금보다 더 크게 널 망칠 거라는 조용하고 단호한 전문가들의 훈계. 중 2병 말기 환자처럼 “당신들이 나에 대해 뭘 알아? “라는 날 선 말을 반지르르한 그들의 얼굴에 퍼부으며 반항하고 싶다가도 꾹 참는다. 재산은 그나마 몸뚱이뿐인 사람이니 전문가의 조언을 귀담아들어야만 한다.      


병원을 나오며 숙면에 효과가 좋다는 영양제를 검색했다. 미용실을 나오며 미용사가 언급했던 제품을 인터넷에서 찾아냈다. 둘 다 가격이 만만치 않다. 이번 달 청구될 카드값을 가늠해 보고 일단 장바구니에 넣었다. 지금 먹고 있는 약과 쓰고 있는 헤어 오일과 트리트먼트가 바닥이 나면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쓴소리를 듣고 혼이 나야 정신이 들고, 겁을 먹어야 실행하는 지독히도 수동적인 삶. 내 인생에서 대부분의 시도와 결과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100% 내 의지였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일을 전문가 선생님들의 조언을 통해 이뤄냈다. 그래서 마음이 느슨해지고, 방향을 몰라 헤맬 때는 일단 밖으로 나간다. 머리를 싸매고 들어앉아 있어 봤자 내 안에는 답이 없다는 걸 이미 나는 잘 알고 있다. 시도의 불씨이자 자극제가 될 누군가의 한 마디를 찾기 위해 문을 열고 나선다.      




예스 24

교보문고

인터파크

영풍문고

알라딘

카카오톡 선물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점보기의 필요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