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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an 21. 2022

왜 제주에는 해장국집이 넘쳐날까?

제주식 해장국 순례기

     

수년 전, 일 때문에 제주에 몇 개월간 산 적 있다. 여행자로 잠시 머무르는 제주와 생활자로 사는 제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여행자와 생활자는 시간의 흐름도, 시야도 다르다. 여행자 신분일 때는 일상을 떠나온 여행자의 특권, 늦잠을 만끽하기 위해 느지막이 움직였다. 하지만 생활자가 되면 보통의 직장인들처럼 일찌감치 움직여야 한다.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제주의 새벽 거리, 환하게 불 밝힌 가게들이 있었고 그 가게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간판마다 해. 장. 국.이라는 세 글자가 크고 강렬하게 써 붙여져 있다는 사실. 블록마다 별다방이 박혀 있는 강남 거리처럼 제주에는 거리마다 해장국집이 있었다. 존재 자체로 포스를 풍기는 노포부터 세련되고 깔끔한 신흥 강자까지... 모르는 게 많은 육지 것(제주 토박이가 아닌 육지에서 온 외부 사람을 부르는 제주말)은 궁금했다. 대체 왜 제주에는 해장국집이 넘쳐날까?      


그 궁금증을 풀고자 제주에 살 때는 틈만 나면, 다시 육지로 돌아와서 여행자가 되어 제주에 갈 때마다 최소 1끼 이상은 해장국을 먹어댔다. 고사리 해장국, 몸국처럼 제주 특산 식재료를 활용한 해장국도 유명하지만 내가 집중한 건 소고기 부속과 선지, 우거지, 콩나물을 듬뿍 넣어 끓인 스타일의 해장국이다. 두툼한 뚝배기 가득 담아 주는 내용물에 취향껏 다진 마늘과 청양고추 썬 것을 넣는 것으로 커스텀할 수 있는 그 해장국 말이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온몸이 빨갛게 불타오르는 알코올 쓰레기지만 제주식 해장국의 비밀이 궁금해 먹고 또 먹었다.      


은희네 해장국 

제주식 해장국의 세계로 처음 인도한 건 <은희네 해장국>이었다. 여행을 가면 로컬들의 음식점을 찾아가는 것에 목숨을 걸던 시절, 추천을 받아 처음 그곳에 발을 들였다. 이 이른 시간에 누가 밥을 먹을까 싶은 새벽 7시. 도시에서였다면 눈도 안 뜰 시간이었지만 이미 가게 안은 만석에 가까웠다. 나 같은 여행객은 물론 현지인들로 아침부터 북적였다. 들어온 사람이 별다른 주문의 말이 없이 앉아 물 한 잔 마시고 숟가락을 세팅하면 금세 펄펄 끓는 뚝배기가 코앞에 당도한다. 분위기에 압도당한 초심자가 분주하게 눈을 굴리자 우리의 상태를 간파한 직원은 물병을 놓으며 말했다. "선지? 아니면 빼고?" 그때만 해도 지금만큼 하드코어 한 것을 좋지 않아 당연히 ’ 선지 없이!"를 주문했다. 무섭게 끓어오르는 시뻘건 국물이 가득한 뚝배기가 당도하자, 미리 공부해 둔 옆 테이블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다진 마늘을 반 숟갈 넣고, 날달걀을 톡 까서 넣는다. 달걀이 터지지 않게 조심조심 숟가락을 넣어 뚝배기 속을 들춰보니 큼직한 소고깃덩이와 우거지들이 가득하다. 중간중간 까만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처럼, 노란 콩나물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맛있는 거에 맛있는 거를 더했는데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코를 자극하는 향에 참지 못하고 국물을 수저 떠 넣었다. 뜨겁고, 진하고, 짜르르한 감칠맛. 전날 술을 먹지 않아 숙취 따위는 없는데도 10년 마지막으로 필름이 끊겼을 때의 숙취까지 소환해 날려버리는 맛이었다. '아! 이래서 제주에 오면 해장국 먹으라고 하는 거였구나.' 제주를 수없이 드나들었던 지인의 당부가 떠올랐다. 강렬한 첫 기억 덕분일까? <은희네 해장국>은 내 혀가 기억하는 제주식 해장국의 기준이 됐다.      



미풍 해장국

<은희네 해장국>, <모이세 해장국>과 함께 제주 3대 해장국으로 꼽힌다는 <미풍 해장국>은 제주 전역에 분점이 있다. 명성이 자자한 3대 해장국 중 가장 늦게 맛을 본 해장국이었다. 해장국 어린이, 즉 해린이에서 해장국 청소년쯤으로 성장한 걸까? 평범한 소고기 해장국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양과 선지가 듬뿍 들어간 양 선지 해장국을 택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빨간 동치미 아니 국물 많은 깍두기 국물을 홀짝홀짝 마셨다. 해장국을 먹기도 전에 시원한 무김치 국물이 속을 달랬다. 곧이어 깔끔하게 손질된 양과 딱 초콜릿 빛깔의 선지가 듬뿍 들어간 양 선지 해장국이 도착했다. 일명 다데기라 불리는 고추 양념장을 따로 달라고 미리 주문했기 때문에 국물은 맑다. 앞선 해장국의 경험들로 이제 고추양념장을 따로 달라고 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넣는 양을 그대로 넣으면 내 입에 짜고 매웠다. 아침부터 마라 없는 마라탕 같은 강렬한 해장국을 먹기엔 내 간은 여렸다. 내 간의 컨디션 수준에 맞게 양념장을 넣고 해장국을 맛봤다. 그간 쌓아 온 해장국의 아성을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맛은 아니지만 기본에 충실했고, 또 꾸밈없는 전형적인 맛이었다. 내 입에는 워낙 깊게 박혀 있는 <은희네 해장국>의 맛을 지우기에는 무리였다.      



+  내 입에는 딱히 인상적이지 않아 <모이세 해장국>에 대한 언급은 이번 편에서 언급 제외 / 김밥 편에서도 그랬지만 누가, 어떤 기준으로 3대 해장국으로 꼽았는지 몹시 궁금하다. 그 비하인드를 아는 분이 계신다면 공유 좀 부탁드린다.


미향 해장국

서귀포 시청 뒤  <미향 해장국>에 발을 들였을 때는 아침 시간이 지난 10시 무렵이었다. 점심을 먹기엔 이르고, 아침을 먹기엔 늦은 시간. 누가 이 시간에 해장국을 먹을까? 싶었지만 이미 여럿이 판을 벌이고 있었다. 시뻘건 해장국만큼이나 시뻘건 얼굴의 사람들이 진한 제주 사투리를 내뱉으며 해장국을 안주 삼아 오전부터 막걸릿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해장국이 해장을 위해서 먹는 음식이 아니라 해장을 하며 먹는 음식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해장국을 받아 들었다. 곁들여 나온 부추와 다진 만들을 듬뿍 넣고 나만의 해장국을 제조했다. 노란 배춧잎이 부드럽게 씹히던 순수한 해장국은 새빨간 고추양념을 풀어헤치니 몰라볼 정도로 변신을 한다. 마치 육감적인 스타일로 변신시켜주는 필터를 끼운 것처럼. 막걸리 한 잔 안 들이켰지만 해장국 한 숟가락에 고추 양념장의 채도로 내 얼굴도 불타올랐다. 뜨겁고 시뻘건 해장국 국물이 빈속을 훑고 지나가며 내 장기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일깨워줬다. 그간 켜켜이 쌓였던 가슴속 응어리들이 해장국 국물로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이 맛 때문일까? 아침부터 얼큰하게 취한 동네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시끄러워도 <미향 해장국>의 문을 또 열게 된다.



백성원 해장국

앞서 만나본 해장국들이 8월의 폭염이나 1월의 혹한이라면, 제주 시청 근처 <백성원 해장국>은 10월 저녁 바람 같다. 맑고, 차분하고, 들뜸이 없다. 분명 임팩트는 약하다. 뚝배기에 용암을 풀어놓은 듯 새빨간 고추기름이 펄펄 끓진 않는다. 해장국의 핵심 국물을 한 입 떠 넣으면 잡맛 없이 단순하고 개운하다. 굳이 고추양념장을 덕지덕지 처바를 필요가 없는 국물이다. 그간 먹어왔던 묵직한 해장국들과는 분명 다른 맛이다. 자칫 심심할 수도 있는 백성원 해장국을 특별하게 만드는 포인트는 따로 있다. 바로 심심한 간장 양념을 잔뜩 머금은 게장이다. 해장국 한 그릇을 시켜도 수북하게 내어 주는 인심이 너그럽다. 껍질이 얇고 살이 가득 차 있는 게장을 입에 통째로 넣으면 탱글탱글한 살이 입안 가득 쏟아진다. 레몬 향이 싱그럽고 달짝지근한 게장은 담백한 해장국 국물과 어울려 입안에 '뽀샵'없는 증명사진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위에 나열한 해장국들 말고도 제주에는 거리마다 해장국 간판을 내건 음식점이 넘쳐난다. 틈날 때마다 해장국의 격전지가 된 제주 곳곳의 해장국집들을 탐방했다. 해장국 국물이 튄 옷의 얼룩을 지우며, 다 식었겠거니 방심하고 해장국을 한 수저 떠 넣었다가 홀랑 까진 입천장에 약을 바른 끝에 나름의 어렴풋한 결론을 얻었다.


일개 여행자에게 제주는 꿈과 낭만의 섬이지만 제주 역시 그곳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삶의 터전일 뿐이다. 파도와 싸우며 고된 바닷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나, 농사일이나 건설일, 또 여행객을 상대하는 일 등등 해가 뜨기도 전에 일찌감치 집을 나서야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제주. 누군가는 하루를 마감하고, 다른 누군가는 하루를 시작하는 그 타이밍에 해장국은 모두에게 환영받는 음식이 아닐까? 게다가 이들은 냉장고에 들어간 차가운 소주는 쳐주지도 않고 한라산 노지(상온에 둔 한라산 소주)를 먹는 게 일상인 사람들 아닌가? 술에 대한 타 지역과 비교할 수 없는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술을 마시는 애주가들이 넘쳐나는 섬에 해장국만큼 어울리는 음식이 어디 있을까?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빠르고 쉽게 먹고 살이의 고단함을 달래주고 또 새로운 에너지를 채워주는 제주식 패스트푸드, 해장국. 그래서 제주는 해장국의 천국이 될 수밖에 없다.


+ 제주의 해장국 집에 갈 때 주의할 점

아침 일찍 가야 제대로 된 맛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음.

가게마다 다르지만 주중에 휴무가 있고,

또 보통 오후 3시만 돼도 문을 닫기 때문에 늑장을 부렸다가는

해장국은 고사하고 굳게 닫힌 문만 보고 올 확률이 높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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