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게 죄는 아니잖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괜찮은 브런치 가게가 문을 열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언젠가 가고 싶은 가게>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두고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날짜와 시간, 날씨와 지갑의 여유가 생긴 어느 토요일 오후, 엄마를 모시고 그곳에 갔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의 대형 병원. 바로 옆에 약국 간판들로 어지러운 이 동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연한 크림색으로 칠한 말끔한 건물이 보였다. 가을이 되면 은행잎이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겹겹이 쌓이기로 유명해 종종 산책 가던 길에 그곳이 있다.
SNS 후기를 통해 미리 예습한 대로 <바질 콜드 파스타>와 <선 드라이 토마토가 올라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하지만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아보카도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 선 드라이 샌드위치는 주문이 어렵다고 했다. 차선책으로 구운 채소를 곁들인 부챗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가게 내부를 훑어봤다. 화려한 장식도 없고, 최소한의 테이블과 화초로만 꾸민 깔끔한 공간. 음식 맛도 이 분위기처럼 깔끔하겠다는 기대가 몽글몽글 피어났다.
잠시 후 커다란 접시를 든 직원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밸런스 좋은 색감과 짭조름한 냄새가 기분 좋은 식욕을 자극했다.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잠시 멈칫했다. 문제는 바질 콜드 파스타 위에 올라간 하얀 덩어리. 난 이미 SNS 후기를 보며 사전에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 정체가 부라타 치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없이 부라타 치즈에 대해 보고, 들은 적 있지만 직접 실물을 마주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껍질을 까 놓은 달걀 같은 이 치즈를 어떻게 먹어야 할지 고민됐다. 서빙을 마치고 막 돌아서려는 직원을 다급하게 불렀다.
저기요. 이 부라타 치즈는 어떻게 먹어야 하죠?
이런 질문이 처음이 아닌지 직원은 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나이프로 반을 가른 후, 펼쳐서 조금씩 잘라 파스타와 함께 드시면 됩니다.
별거 없었다. 파스타 위에 단정하게 올라간 치즈를 잘라먹으면 됐다. 모양이 흐트러지기 전, 사진을 찍고 파스타와 소스를 잘 섞은 후 한쪽으로 치워둔 치즈의 배를 갈랐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모차렐라 치즈처럼 탄력이 있었는데 자르고 보니 치즈 안에는 부드러운 크림 질감의 치즈가 있었다. 치즈 껍질과 크림 부분을 적당히 잘라 파스타와 함께 입에 넣었다. 간간한 파스타와 싱그러운 바질, 부드럽고 고소한 치즈 맛이 어우러져 포근한 맛이 났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이탈리아에서 여름을 보낸다면 이런 음식을 달고 살지 않을까?’ 싶은 맛이다.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이 있다. 난 언제부터 이렇게 얼굴이 두꺼워졌을까? 예전의 나였다면 낯선 식재료를 앞에 두고 어떻게 먹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 고민했을 거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모르면 바로 물어본다. 어릴 때의 난 모르는 것 앞에서는 한껏 쭈굴쭈굴했다. 세상에 모든 걸 다 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걸 누군가에게 들키는 게 창피했다. 100% 심도 있는 대화는 아니어도 습자지만큼 얇은 지식으로 꾸역꾸역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책이나 영상 속 주인공들의 경험을 흉내 내고, 지인들의 경험이 내 것인 것처럼 포장했다. 날고 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오롯한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경험은 언젠가 바닥을 보이게 마련이다. 모르는 게 창피한 게 아니라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게 더 창피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은 온다. 그럴 때는 솔직함이 답이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이 자세로 다가선 사람에게 돌아오는 건 ‘무시’가 아니라 ‘친절’이었다. 지레 겁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딱히 무시당한 경험도 없으면서 혼자 주지도 않을 상처를 받을까 봐 벌벌 떨고 있었다.
지금도 종종 과거의 나를 닮은 사람들을 본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 보다 우월하다는 걸 증명하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볼 때면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그렇게 애써서 우월함을 증명하면 뭐가 남을까? 이번 단계를 넘으면 다음에 더 높은 단계에 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는 나보다 대단한 사람이 끝없이 차고 넘칠 텐데. 내가 하루라도 빨리 그 현실을 깨달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든다. 지금도 모르는 걸 알기 위해 공부하고, 시도하고, 경험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모르는 게 죄는 아니다. 진정한 죄는 모르는 걸 모르는 채로 넘어가는 것, 더 큰 죄는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것. 진짜 최악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며 모르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알 수 없다. 내가 잘 아는 건 나누고, 모르는 건 알아 가려고 노력하는 것.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세상이 더 이상 어렵고 불편하고 두렵진 않을 거다.
부라타(burrata) 치즈?
이탈리아 풀리아주에서 생모차렐라에 스트라차텔라 치즈와 생크림을 넣어 복주머니 모양으로 만든 프레시 치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