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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14. 2018

함께 여행을 한 후 알게 된 엄마, 아빠의 커피 취향

이제야 알게 된 부모님의 취향저격 카페 메뉴들

    

     


난 47년생 아빠, 52년생 엄마의 3녀 1남 중 셋째 딸이다. 위로 언니가 둘 있는 걸 감안하면 그다지 부모님의 나이가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부모님이 그러하듯 두 분의 삶의 목표는 간결했다. 줄줄이 딸린 자식들을 배곯게 하지 않고 무사히 학교를 졸업시키는 것.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그 목표를 위해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평생을 시장에서 앞만 보고 달리며 땀 흘리셨다.

     

어릴 땐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우리 아빠는 넥타이 매고, 양복 입고 출근을 하지 않을까? 왜 우리 엄마는 비올 때 우산을 가지고 학교에 날 데리러 오지 않을까? 그게 궁금했고, 그게 불만이었다. 하지만 나도 돈을 버는 나이가 되고, 아등바등 살면서 부모님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짐작하게 되었다. 비 온 뒤 죽순처럼 쑥쑥 크는 자식 넷을 밥 먹이고, 공부시키기 위해 얼마나 쫓기듯 사셨을까?... 그래서 부모님 두 분의 인생에 여유, 사색, 호사 같은 단어는 사치였다.

     

부모님의 커피 취향 또한 그랬다. 아빠는 하루에 세 번, 식후 먹는 믹스 커피가 일생의 낙인 분이다. 쌀 떨어지는 것보다 믹스 커피 떨어지는 걸 두려워하며 살아온 할머니의 아들다운 취향이다. 워낙 달달한 군것질을 좋아하시고, 시간에 쫓기니 봉지만 딱 뜯어 뜨거운 물에 넣고 봉지를 스푼 삼아 휘휘 저으면 완성되는 노란색 맥심 믹스커피가 아빠의 입엔 딱이었다. 엄마는 원래 커피를 안 드셨는데 커피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살다 보니 변하셨다. 카누 한 봉지로 다섯 번은 마실 정도로 보리차 수준이지만 그래도 커피를 드시기 시작하셨다. 부모님께 한 잔의 커피는 “여유”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에너지 드링크“ 정도였다.

     

믹스커피, 보리차 같은 블랙커피가 전부인 줄 알았던 부모님의 커피 취향을 확대시킨 계기는 ‘여행’이다. 여행을 할 때,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다. 지친 여행자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해주는 공간이자 현지인들의 휴식 풍경을 볼 수 있는 일종의 관광명소이기 때문이다. 보통 아빠는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고향의 맛’이 담긴 믹스커피를 아침에 호텔에 마시고 나온다. 점심을 먹고 소화시킬 정도로 여행지를 돌고 나면, 으레 카페로 향한다. 처음 아빠를 모시고 카페에 갔을 때, 주문대 앞에서 고민하다 직원 분께 추천을 받기로 했다.

     

달달한 커피 좋아하시는 아빠가 드실 건데 어떤 게 좋을까요? 추천해주세요

     

나는 평소 단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단 커피의 세계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직원 분께 SOS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직원 분은 <캐러멜 마끼아또>와 <아포가토>를 추천했다. 난 98%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 눈이 내리는 날이거나, 무척 기운이 없을 때, 스트레스받았을 때 간혹 마시던 그 메뉴들이었다. 아... 나도 몰랐지만 할머니, 아빠로 이어지는 커피 DNA가 나에게도 존재하긴 했구나 싶었다.

     

평소 마시던 믹스 커피의 몇 배에 달하는 비싼 카페 커피를 마시는 게 몹시도 못마땅했던 아빠였다. 하지만 이곳은 한국의 믹스커피를 팔지 않는 곳이다. 내가 들고 온 아포가토 앞에서 잠시 멈칫하셨다. 커피를 사 온다던 딸이 들고 온 아이스크림이 뭔가 싶으셨던 거다. 아이스크림 위에 에스프레소를 살짝 끼얹으면서 말했다.

     

“이 커피 이름은 <아포가토>야. 진하게 내린 커피를 아이스크림 위에 뿌려서 먹는 거야”

     

아이스크림을 받아 든 5살 아이처럼 작은 스푼을 이용해 에스프레소를 뿌린 아이스크림을 조심조심 떠드셨다. 이런 것도 커피냐며 슬쩍 웃으셨다. 다음번 카페에 가서는 캐러멜 마끼아또를 주문했다. 밀크 폼 위에 뱅 그르르르 두른 캐러멜 시럽이 흩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드셨다. 마지막엔 숭늉 마시듯 십스틱(일명 커피스틱)으로 휘휘 저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캐러멜 마끼아또의 향긋하고 달달한 맛은 아빠의 입에, 머리에 오래도록 남았었나 보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가끔 부모님과 함께 카페에 갔다. 아빠는 두 메뉴의 이름을 제대로 말한 적은 없다.

     

“아빠는 뭐 드실래요?”

     

“아이스크림 위에 커피 뿌려 먹는 그 거” 

혹은 “아이스크림 들어간 거”

혹은 “단 거... 그거 있잖아. 캬라멜... 들어 간 거”

     

캐러멜 마끼아또, 아포가토 그 이름 자체가 낯설고 입에 붙지 않는 거다. 내가 제주도에 살 때, 딸을 보러 부모님이 내려오신 적이 있다. 내가 출근을 하면 두 분끼리 시간을 보내셔야만 했다. 그날은 집 근처에서 시작하는 올레길을 걷는다셔서 조심히 다녀오시라고 하고 나는 먼저 집을 나섰다. 그날따라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걱정된 마음에 전활 걸었더니, 비가 와 급하게 카페에 들어왔다고 하셨다. 그래서 뭐 드셨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웃으며 말하셨다. 아빠가 처음으로 스스로 아포가토를 주문하셨다고.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그날의 상황을 다시 자세히 부모님께 들었다. 아빠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커피 주문하는 거 별거 아니라는 듯, “아. 포. 카. 토 먹었다”라고 간결하게 말씀하셨지만 어깨는 귀까지 올라와 있고, 광대는 하늘로 승천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진실은 엄마가 옆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 주신 후, 주문대에 가서 아빠가 앵무새처럼 따라한 거였을 뿐이었다. 그래도 평생 믹스커피가 전부인 줄 알고 사시던 아빠가 인생의 황혼 무렵 여유롭게 카페에 가고, 스스로 본인의 입에 맞는 커피를 주문해 드셨다는 게 왠지 뭉클했다.          


엄마는 여전히 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드신다. 다만 보통 2샷이 보통인 아메리카노는 “독하다 “셔서 주문할 때 아예 샷을 반만 넣어달라고 한다. 조절이 불가능할 때는 별도로 뜨거운 물 한잔을 더 달라고 해서 본인의 취향대로 조절해 드신다. 그래서 남은 커피는 늘 내 몫이다. 엄마와 함께 카페에 가면 난 1.5잔의 아메리카노를 먹게 된다.

     

엄마와 카페에 가서 뭉클해진 건, 대만에 다녀온 후부터다. 대만 길거리에서 <버블티>를 맛본 후 엄마는 종종 카페에 가면 “개구리알 같은 거 들어간 그거 있냐?”라는 질문을 하신다. 대만에서 먹었던 낯선 식감의 음료가 엄마에겐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나 보다. 버블티로 유명한 대만에서 온 브랜드 <공차>에 모시고 갔을 때는 이건 뭐라고 해야 주문할 수 있냐고 물어보셨다. 이 맛을 친구분들께도 보여주고 싶으시다고 했다. 보통 나는 블랙 밀크티, 라지 사이즈, 당도 30%, 얼음 조금(Less), 펄 추가해서 엄마의 버블티를 주문해드리곤 했다. 젊은 사람들도 처음엔 버벅거리기 십상인 난해한 메뉴 주문법을 엄마가 기억하긴 무리다 싶었다. 그래서 잔에 붙은 주문 스티커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드렸다.

     

“엄마, 직원한테 이거 보여주고 이대로 만들어달라고 해”

     

여행을 통해 경험한 세계를 일상에서도 즐기는 부모님의 모습을 볼 때면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하고 울컥하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이제 지나간 빛바랜 유행이 되어버린 아포가토도 버블티도 부모님들에게는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였던 거다. 함께 하는 여행이 아니었다면 난 영영 몰랐을 테고, 부모님 또한 평생 결코 시도하지 않을 메뉴였을 것이다. 부디 부모님 두 분 모두 오래도록 건강 유지하셔서 또 여행을 함께 하길 바란다. 평생 먹고살기 바빠 부모님들은 몰랐지만 세상엔 두 분의 취향에 딱 맞는 즐거움들이 널리고 널렸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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