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다이어리 시작의 변(辯)
부지런한 핸드폰 사진첩 기능이 5년 전 오늘이라며 전체가 붉은 톤인 사진 하나를 추천해 줬다. 5년 전 오늘, 일본 교토 청수사에 내가 있었다.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교토 단풍을 보러 간 참이었다. 또 다른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스페인 라리가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보러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온 지 3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스페인을 비롯해 영국, 포르투갈을 포함한 한 달간의 서유럽 여행의 여운을 정리하기 위한 짧은 일본 여행이라니... 2016년 내내 외노자로 살며 얻은 내 인생에 두 번은 없을 통장 호황기였기에 가능한 날들이었다. 5년 전의 나는 돈 걱정 없이 사는 게 이런 맛이구나 처음 알았다. 5년 후의 보릿고개를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부유한 5년 전의 나. 그때 악착같이 모았다고 해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보장이 없다. 오늘의 상황을 알았다 해도 다시 오지 않을 2016년의 즐거움을 포기할 내가 아니다. 하지만 그 찰나의 달콤함이 있었기에 그 추억을 먹이 삼아 두고두고 곱씹으며 산다.
5년 전의 내가 오늘의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더 없는 통장 호황기를 맞았던 2016년이 다음 해, 인생의 격변기를 맞았다. 제2의 통장 호황기를 꿈꾸며 연초 야심 차게 외노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손바닥 뒤집듯 뒤집힌 국제 정세(?)에 직격타를 맞아 일주일 만에 도망치듯 귀국했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에 속상해 봤자 나만 손해다. 어쩌겠냐 싶어 원래 일하던 바닥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고, 몰아치는 일의 소용돌이에 허우적거리다 번아웃이 왔다. 몸도 마음도 누더기가 되어 버는 족족 병원비로 썼다. 양, 한방을 넘나드는 병원 순례를 하며 현타를 맞았다. 뭐하자고 이렇게 몸 갈아가며 일을 하는 걸까? 아마 일의 양과 강도는 별다르지 않았을 텐데 내 몸과 마음이 변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밥벌이하던 이 바닥의 일에 신물이 났다. 정이 뚝 떨어졌다. 일이 나를 구원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아는 것과 체감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글들이 쌓여 책이 됐다. 막연히 내 이름 박힌 책을 내고 싶다 생각만 했지, 그게 현실이 되리라고 5년 전의 나는 감히 상상도 못 했다. 인생에 한 번 일 줄 알았던 출간은 두 번이 됐다. 책을 낸다고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나는 5년 전과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 이렇게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대부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면에서는 분명 변했다. 1년 전과 올해가 크게 다르지 않지만 5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극명하게 다르다.
얼마 전, 두툼한 다이어리를 선물 받았다. 선물한 이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김에 근처 서점에서 구경하다가 눈에 띄어 샀다며 은은한 오로라 빛을 품은 <5년 다이어리>를 건넸다. 예상치 못한 선물은 기쁨이 두 배가 된다. 겉으로는 선물 받은 행복감과 감사함을 내뿜었고, 머릿속에서는 언젠가 읽었던 책 하나가 떠올랐다. 윤혜은 작가의 에세이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 작가가 열여덟 살에 십 년 일기장을 만나 매일 밤 일기장을 썼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단순한 산수적 계산으로 십 년 일기장에 비하면 절반만 채우면 되는 쉬운(?) 미션이다. 그냥 날짜와 빈칸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5년 다이어리. 막상 펼치니 날짜별로 주제가 되는 질문들이 있고, 해별로 4줄 정도 쓸 수 있는 공간이 구분되어 있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부터 ’내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보자‘, ’내 묘비에 남기고 싶은 말‘까지 365*5=1,825개의 답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다이어리의 묘미는 아무래도 같은 질문에 대해 5년간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발견하는 기쁨일 거다.
그 다이어리를 받자 마자 5년 후의 내가 몹시 궁금해졌다. 사실 매년 1월이면 (아니 정확히는 12월 중순 즈음)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한다. '올해는 꼭 끝까지 완주 하리라!' 굳은 다짐을 하며. 하지만 길어야 5월, 보통은 3월도 못가 흐지부지되곤 했다. 작년 난생처음으로 1년 내내 다이어리 쓰기에 도전했지만 80%만 성공했다. 100%가 아니어서 그랬을까? 다이어리에 쓰는 에너지에 비해 다이어리가 주는 기쁨? 즐거움? 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남들이 입이 닳도록 칭송하는 일기 쓰기의 효과가 내게는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다이어리가 탄생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어쩌면 다이어리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라고. 먼지가 쌓여 가는 다이어리가 책장에 가득하다.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5년 다이어리>를 부지런히 펼치고, 또 써 내려갈 거다. 연말의 내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5년 후의 내 모습이 궁금해서.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결과를 얻은 사람인지,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인지... 분명 지금보다 주름도 늘고, 여기저기 쑤신 곳도 많은 낡은 몸뚱이겠지만 그 안에 다양한 경험과 깨달음으로 채워진 단단한 나로 진화하는 과정이 5년 다이어리에 담겨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