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져들고야 마는 겨울 한정 그 냄새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감각이 있다. 계절마다 그 감각은 조금 더 예민해지거나 무뎌진다. 먹는 게 일생의 낙인 나 같은 인간에게 미각(味覺)은 기본값이니 제쳐 두고 나머지 감각을 계절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봄에는 시각이 발달한다. 까만 땅을 뚫고 나오는 초록 새싹부터 분홍 벚꽃, 노란 개나리, 투명한 아지랑이까지 사방이 볼거리 천지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금세 사라져 버리니 타이밍이 중요하다. 반면 여름에는 촉각이 예민해진다. 뜨거운 햇빛이 살갗에 닿으면 화끈거리다 못해 따갑다. 어디 기온뿐일까? 사우나에라도 들어앉은 듯 습한 열기는 수만 개의 땀구멍을 활짝 열게 만든다. 실내로 가도 공간 가득 풀가동하는 냉방기기 탓에 닭살이 돋는다. 가을에는 청각이 민감해진다.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면 가을이 왔다는 신호다. 바짝 바른 낙엽을 밟을 때 나는 바스락 소리, 낙엽 더미 위로 밤송이며 도토리가 떨어지는 소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억새와 갈대 소리를 악착같이 챙겨 들으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한다.
먼 길을 돌아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겨울을 만날 차례다. 이 계절에는 비염인이 아니어도 코가 민감해진다.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향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 한정 그 냄새를 맡고 싶어 비염인은 부지런히 코를 킁킁거린다.
누구나 가슴속에 상처... 아니 현금 삼천 원쯤 품고 살아야 하는 이유? 바로 날이 차가워져야 제철이 되는 길거리 음식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달달한 향기가 코에 닿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 바로 붕어빵 / 호떡 / 군고구마 삼총사. 탄수화물과 열이 결합해 만드는 달콤한 향은 나를 무장해제 상태로 만든다. (설마 있는 거 아니야?) 제발 향수로 만들어 팔아주길 바랄 정도로 사랑하는 향이다. 한때 지하철을 평정했던 델*만쥬처럼 실제 맛보다 향이 더 유혹적이지도 않다. 달달 삼총사의 향이 코에 닿는 순간 뇌는 빠르게 작동한다. ’ 먹는다’라는 답은 정해져 있고 나는 그저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사실 냉정하게 성분을 따지면 밀가루 + 팥 = 붕어빵/ 밀가루 + 설탕 = 호떡처럼 탄수화물에 탄수화물을 더한 탄수화물 그 자체라 먹으면서도 묘한 죄책감이 든다. 하지만 겨울은 그 지독한 죄책감마저 얼어붙게 만든다. 길고 지루한 겨울을 견디게 해주는 이 음식을 외면할 만큼 난 냉정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달달 삼총사를 파는 노점의 향기가 코끝에 스치면 일단 가던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갑의 현금 사정부터 헤아린다. 세상이 좋아져 계좌 이체하는 곳도 많으니 걱정은 없다. 다만, 무섭게 치솟는 물가에 가뜩이나 보기 힘들었던 달달 삼총사를 파는 노점들이 더 희귀해진 현실이 슬플 뿐이다. 그래서 어쩌다 달달함의 성지를 만나면 속절없이 지갑을 열게 된다. 단돈 몇 천 원에 꽁꽁 얼었던 몸과 마음 가득 황금빛 달달함이 퍼진다. 매년 겨울이면 천 원짜리 몇 장으로 부자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자꾸만 안으로 파고들게 된다. 집 안으로, 이불 안으로, 누군가의 품 안으로. 이른 아침, 잠을 털고 일어나 습관처럼 창문을 열면 텁텁한 실내 공기가 빠져나가고 매서운 찬 공기가 안으로 훅 들어온다. 뜨거운 프라이팬 위의 인절미처럼 펑퍼짐하게 늘어져 있다가도 겨울 아침 공기를 맡으면 정신이 바짝 든다. 미세먼지가 없는 운수 좋은 날이면 평소보다 창문을 더 활짝 열어 신선한 겨울 아침 공기를 만끽한다. 그 공기 안에는 여러 질감과 모양의 냄새가 섞여 있다. 사람의 발에 밟혀 바스러진 낙엽 냄새, 얼어붙은 흙냄새, 수분감 가득한 눈송이 냄새, 옆집의 보일러에서 흘러나온 텁텁한 배기가스 냄새, 자동차의 매연 매캐한 냄새까지... 다른 계절보다 확실히 진하고 강렬하게 코를 파고든다. 몸 안에도 제3의 코가 있는지 장기 구석구석에 퍼지는 찬 겨울 공기 냄새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칼바람에 정신을 잃기 쉬운 계절이지만 겨울 아침 공기 냄새를 맡으면 꺼져 있던 ‘부지런 스위치’가 딸깍하고 켜진다. 온수 매트 위에 몸을 셀프 박제하고 싶다가도 이 냄새를 맡으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된다. 봄의 새싹들을 위해 바스러진 낙엽이 언 땅으로 스며 열심히 거름이 되는 것처럼, 낙하하기 위해 열심히 공기 중 수증기를 끌어모으고 얼어붙는 눈송이처럼, 두껍게 내려앉은 어둠과 추위를 뚫고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성실한 새벽 출근자처럼 바지런하게 움직이게 된다.
한 해의 시작과 끝을 함께 품은 겨울. 그중 가장 나를 들뜨게 하는 이벤트는 역시 크리스마스다. 일상의 BGM은 11월 초부터 일찌감치 캐럴이 플레이된다. 산타 할아버지가 주는 선물을 받으려고 눈물을 참는 어린이도 아니고, 호텔을 잡아 파티를 벌이는 열정 넘치는 청춘도 아니지만 이 겨울에 그저 크리스마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두근거린다. 빨간색, 초록색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면 기분이 들뜨고, 크리스마스 시즌 한정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굳게 닫힌 지갑도 열린다. 그중에서도 크리스마스 냄새는 딱 한 가지로 정할 순 없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마시게 되는 따끈한 뱅쇼의 시나몬 향, (대부분은 플라스틱이라 상상의 향이겠지만) 크리스마스트리의 그윽한 우디향, 반짝이는 전구가 내뿜는 따듯하고 달콤한 향, 뻔한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며 먹는 캐러멜 팝콘 향, 다이어리를 받기 위해 먹는 별다방 커피 향 등등이 뒤섞여 있다.
곳곳에 흩뿌려진 각종 크리스마스 냄새를 있는 힘껏 빨아들인다. 크리스마스 기운으로 가득 찬 폐는 무겁게 가라앉았던 기분을 두둥실 띄워준다. 올 한 해가 다 가는데 뭐 하나 뾰족하게 이룬 게 없다는 허무함, 며칠만 지나면 속절없이 한 살을 더 먹어야 한다는 무기력함, 나만 빼고 다 행복해 보이는 공허함 따위 알 게 뭐야.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지. 나의 기쁨 지수를 단시간에 올려줄 크리스마스 냄새를 수집하러 부지런히 움직인다. 겨울은 길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은 더없이 짧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