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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an 02. 2023

나의 속물근성을 확인한 순간  

노숙자가 받은 카드의 비밀

     

지난 금요일, 2022년의 업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이라 일찌감치 일이 끝났다. 겨울 해가 짧은 탓에 오랜만에 환할 때 집에 가는 게 마냥 신났다. 저녁 메뉴는 뭐가 좋을지 상상하며 집 근처 전철역에 내렸다. 가벼운 발걸음 탓에 평소 퇴근길이었다면 100%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꾸준하게 등산과 요가로 단련한 튼튼한 두 다리면 충분했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묘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역과 붙어 있는 백화점에서 산 선물이 든 쇼핑백을 양손 가득 들고 회전문을 빠져나오는 사람들과 용케 역무원들의 눈을 피해 자리를 잡고 구걸을 하는 노숙자들. 서로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각자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상태였다. 2022년의 연말을 맞이하는 양 끝단의 사람들을 한눈에 담겼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나는 그저 집에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발걸음을 총총 옮기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목격했다. 머리맡에 구깃구깃한 신발 상자를 펼쳐 놓고 굽은 등을 둥그렇게 만 채 구걸을 하던 노숙자. 그 곁으로 세 명의 남자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곱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그의 옆에 놓고 조용히 가던 길을 갔다. 노숙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원래 걷던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사라지는 남자들... 그들의 행동이 왜인지 곱게 보이지 않았다. SNS에 종종 등장하는 사회실험(실험/관찰/감동 카메라) 콘텐츠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인 채 자행하는 일반인 대상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의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처에는 추위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뿐. 카메라도, 제작진도 보이지 않았다.      


궁금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호기심이 발동해 선물 받은 노숙자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깜짝 선물의 등장에도 놀란 기색이 없던 노숙자는 나무늘보 같은 느릿한 손길로 선물 상자 집어 겉에 붙은 카드부터 꺼내 확인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순 없었다. 오랜 거리 생활로 표정을 잃은 건지, 추위에 얼굴이 얼어 버린 건지 그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던 얼굴에서 서서히 희미한 미소가 퍼졌다. 딱 여기까지였다. 내가 목격한 그날의 일은. 이 에피소드의 사정이 궁금해 걸음 속도를 늦췄는데도 내게 허락된 상황 목격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었다.      


전철역에서 집까지 걸리는 10여 분. 아직 떼지 못한 크리스마스 장식물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번화가를 지나 한적한 집 근처 골목을 지나 집 현관문을 열 때까지 머릿속을 동동 떠다니는 궁금증은 하나였다. 카드 속 내용도, 선물의 정체도 아닌 노숙자는 왜 카드부터 펼쳐 봤을까? 내가 거리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노숙하는 입장이었다면 선물의 정체가 궁금해 상자부터 뜯어봤을게 분명했다. 일면식 없는 사람이 건넨 선물 상자 속 내용물이 궁금해 성난 야수처럼 선물 포장지를 뜯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렇다. 나는 한없는 속물이다. 하지만 남자는 아니었다. 찬바람이 닿지 않는 고기능성 옷을 겹겹이 껴입고, 목도리와 장갑까지 장착한 채 주머니에는 휴대용 손난로까지 중무장한 상태로 뭐라도 더 가지고 싶어 안달 난 내가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카드 속에 어떤 메시지가 적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때가 찌든 해진 옷을 입고 차가운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의 언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녹여줄 메시지였다는 건 분명했다. 거리를 집 삼아 사는 그들에게 어쩌면 커다란 선물보다 더 필요했을 작은 카드 속 메시지 한 줄처럼 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올해도 역시나 ‘쓰는 사람’으로 살아갈 내게 카드 속 메시지를 읽어가는 노숙자의 표정은 꾸준히 풀어야 할 숙제처럼 가슴속에 남아 있다. 한 문장을 쓰더라도 읽는 사람들에게 따끈한 재미와 따뜻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번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겠지만 꾸준히 쓰다 보면 어쩌다 한 번은 그 목표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올해도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끈기 있게 쓰리라 다짐한다. 2023년은 이제 시작이고, 내게는 써야 할 날들이 가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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