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이 비워지지 않는 이유
요 며칠 엄마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다시 주방의 지휘자가 됐다. 냉동실 채소 칸을 여닫을 때마다 몇 주 전, 엄마가 사놓은 양배추 반 덩이가 눈에 밟혔다. 강된장을 곁들인 양배추 쌈을 해 먹고도 남은 반 통이었다.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보니 채소 칸에 며칠 더 감금시켜 놓으면 저세상으로 떠날 상태다. 머리를 굴려 양배추를 빠르게 소진할 메뉴를 고민했다.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건 일본식 양배추 부침개쯤 되는 오코노미야키. 마침 엄마가 겨울잠 자기 전의 다람쥐처럼 냉동실에 곱게 모셔둔 가문어 부스러기를 발굴했기에 냉털 즉 냉장고 털어먹기 메뉴로 정했다.
다시 냉장고를 훑으며 오코노미야키에 들어가야 할 재료를 체크했다. 대파, 당근... 이 정도면 부재료로 충분하다. 그리고 마가 들어가는 반죽은 부침가루로 대신하고, 마요네즈도 조금 남아 있으니 얼추 오코노미야키 흉내는 낼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그런데 오코노미야키의 화룡점정이 없다. 일반 가정에 오코노미야키 전용 소스를 구비해 두고 사는 집이 몇이나 될까? 우리 집도 그런 정성은 없다. 대체할 소스가 있나 냉장고 문 쪽 소스 구역을 뒤져 보니 손톱만큼 남은 돈가스 소스가 보인다. 병을 돌려 엉덩이 쪽 유통기한 날짜를 보니 작년 12월 날짜가 찍혀 있다. 지체 없이 소스를 버리고 마트로 향했다. 허니 머스터드소스와 핫소스로 오코노미야키를 만들 순 없으니까.
오늘 마트 쇼핑의 목적은 오코노미야키. 전용 소스도 있었지만 앞으로 오코노미야키를 또 몇 번이나 먹을까 싶어 비슷한 우스터소스 베이스의 돈가스 소스를 골랐다. 이대로도 충분하지만 뭔가 쉬운 거 같아 마트를 빙빙 돌아 수입 식자재 코너에서 가쓰오부시를 찾아냈다. 채소 반죽에 해물을 넣고 부친 한국의 해물 부침개와 일본의 오코노미야키가 다른 노선으로 간다는 걸 확실히 느끼게 하는 포인트가 바로 훈제 가다랑어포, 가쓰오부시다. 약 2천 원어치 정도 남은 양배추를 소진하기 위해 돈가스 소스와 가쓰오부시를 장바구니에 넣고 보니 도합 약 1만 원 정도 더 썼다. 이과생이 아니어도 산수만 할 줄 안다면 알 수 있다. 뭔가 앞뒤가 뒤바뀐 손해 보는 지출이라는 걸.
지난번 홍어 무침 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작은 것을 얻으려고 더 큰 소비를 했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이래서 아무리 냉장고를 비우고 비우려고 해도 다시 뭔가 들어찬다. 생각을 비우려고 노력해도 다시 생각으로 들어차는 내 머릿속처럼. 하나를 소진하려고 둘, 셋을 더하는 이상한 계산 습관 때문에 냉장고가 비워지는 속도는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디다. 의도와 다른 결과에 잠시 낙담했다. 하지만 이대로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다시 부지런히 소진하면 된다. 유명한 전문점에서 파는 정통 오코노미야키가 장당 1만 5천 원~2만 원 사이니까 가정식으로 간소화된 약식 오코노미야키라도 당분간 무한대로 먹을 수 있으니 손해 보는 건 아니라고 애써 나를 다독인다. 불필요한 소비를 한 건 아닌가 (아니긴 뭘 아니야 맞지!) 하는 자책에 축 늘어진 어깨를 토닥인다.
가문어 파지를 물에 불리고, 양배추를 필두로 파와 당근 등 채소를 채 썬다. 부침가루에 얼음물을 붓고 반죽한다. 불린 문어와 채소를 넣어 섞은 후 여기에 내 요리의 필수품, 참치액 몇 방울을 떨어뜨리면 반죽은 완성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팬에 기름을 두르고 반죽을 올린다. 늘 먹던 얇고 바삭한 김치부침개와 다르게 오동통하게 모양을 잡는다. 앞뒤로 노릇하게 굽고 접시 위에 안착시킨다. 하얀 마요네즈를 바르고 갈색 돈가스 소스를 뿌린 뒤 숟가락 등으로 넓게 펴 바른다. 마지막으로 가쓰오부시를 듬뿍 얹는다. 두툼한 오코노미야키가 내뿜는 열기에 가쓰오부시가 춤을 춘다. 마이너스의 소비로 쓰린 가슴을 시판 오코노미야키와는 스케일이 다른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재료 듬뿍' 오코노미야키로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