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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ul 02. 2024

설거지옥과 설거지테라피 사이

치유가 되는 노동, 설거지


세상에 아직도 식세기 없는 집이 있어?

얼마나 편한데... 완전 신세계야.

설거지 같은 귀찮은 일, 기계한테 맡기고 더 중요한 거 해.       


로봇 청소기, 빨래 건조기와 함께 삶의 질을 올리는 현대 지성인(?)의 3대 필수템, 식기세척기. 그런 건 우리 집에 없다. 들여놓을 여유 공간이 없어 마음에 둔 적도 없지만 애초에 설거지를 좋아하는 내게 딱히 필요 없는 존재다. 그런데 식기세척기가 없다는 사실을 말할 때마다 유인원을 갓 벗어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만난 듯 놀라는 상대의 반응에 당황스럽다.      


대부분 집안일을 성가시다고 여기지만 사람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좋아하는 집안일이 있다. 청소, 빨래, 장보기 등 많은 집안일 중 하나를 꼭 해야 한다면 내 선택은 ‘설거지’다. (단, 음식물 쓰레기 치우는 것이 제외됐다는 대전제가 필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점. 4인 가족 기준 한 끼 식사 후의 설거지 양이라면 음식물 찌꺼기가 말라비틀어져 있는 상태만 아니라면 10분 안에 말끔해진 싱크대를 만들 수 있다. 설거지가 필요한 식기들로 싱크대가 만석이면 덩달아 내 머릿속도 뒤죽박죽이 된다. 그래서 요리하는 중간중간 (예를 들자면 냄비 물 끓기를 기다리거나, 팬이 달궈지는 사이) 사용한 조리 도구와 그릇을 설거지하면서 수시로 싱크대를 비운다.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 설거지 법이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설거지한다. 그릇의 잔여 음식물을 걷어 내고, 거품 낸 수세미로 구석구석 씻긴다. 그 후 물로 충분히 샤워시키고 식기 건조대에 작은 것부터 차곡차곡 쌓으면 끝. 설거지할 때는 생각보다 다양한 감각이 필요하다. 먼저 매의 눈으로 기름기 없는 그릇과 그렇지 않은 그릇을 구분한다. 또 포크나 국자 손잡이 뒤편의 홈, 냄비 뚜껑의 틈 사이에 음식물이 남지 않도록 섬세한 수세미 질은 필수다. (고운 손 절대 지켜!) 도톰한 고무장갑을 꼈어도 손끝 감각으로 그릇에 세제나 음식물 잔여물이 남지 않았는지 섬세하게 체크한다. 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의 식기를 쌓을 때는 빨리 마를 수 있도록 공기가 통할 틈도 잊지 않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몸과 머리를 동시에 쓰는 한바탕 열정적인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몸에 흔적이 남는다. 여기저기 튄 물 자국 때문에 배 부분은 축축하지만 작은 성취의 기쁨에 기분이 산뜻해진다. 꼬질미 가득한 조금 전 모습과 달리 식기 건조대 위에서 마르기를 기다리는 말끔한 그릇을 보면 별일 아닌데도 뿌듯하다.      


설거지가 좋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내 맘대로 되는 거 하나 없는 세상을 살면서 단 몇 분, 나의 관심과 에너지를 써서 멀끔해진 존재를 탄생시킨다는 점이 기쁘다. 세상에서 설거지가 제일 싫다는 사람들도 많다. 방심하면 여기저기 물이 튀고, 자칫 그릇이 깨지면 위험할 수도 있고, 단순 반복 작업이어서라는 게 그 이유다. 식기세척기는 21세기 과학 발전의 은혜라며 입이 닳도록 찬양하는 ‘식세기’ 옹호파의 강력한 주장에 솔깃한 적도 있다. 그들의 끈덕진 권유에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통적인 방식의 손 설거지를 고수한다. 그 손맛이 좋아서.      


반설거지파들은 귀찮은 일은 식세기에게 맡기고 그 시간에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게 중요한 업무나 공부일 수도 있고, 휴식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다. 재테크 책 한 줄이라도 더 읽고, 아이와 눈 맞춤하며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설거짓거리를 식세기에 넣고 침대나 소파 위에서 뒹굴뒹굴하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돌아서면 쌓이는 ‘설거지옥’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식세기에게 ‘잡일’을 맡기고 각자의 ‘가치 있는 일’의 세계로 다이빙한다.      


요즘 난 매일 싸우며 산다. 싸움 상대는 별로인 것 투성이인 나다. 나이는 차고 넘치는데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나. 번듯한 내 집도 내 차도 없이 통장은 텅텅 빈 나. ‘다 나 잘 되라고 하는 말’을 잔소리처럼 느껴져 슬쩍 귀를 막는 나. 책임져 주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를 끌어안고 끙끙거리는 나.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잘도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좀처럼 괜찮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나. 이렇게 별로 투성이지만 설거지를 하면 고민에 찌든 내 몸과 마음도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그릇에 덕지덕지 붙은 음식물 흔적을 물로 씻어내듯 내 몸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걱정도 물과 함께 배수구로 빨려 들어간다. 설거지가 더 재밌어지는 순간은 묵은 때를 만날 때다. 과탄산소다에 뜨거운 물을 붓고 때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수세미로 박박 문지른다. 걱정, 고민, 불안 등 내 마음의 묵은 때를 벗긴다는 심정으로 손에 힘을 줘서 때를 벗겨 낸다. 누군가에게는 귀찮고, 짜증 나는 설거지가 내게는 성취감과 뿌듯함을 은은하게 채우는 일종의 ‘테라피’다. 그래서 오늘도 식사가 끝나면 후다닥 일어나 고무장갑부터 낀다. 이 좋은(?) 설거지할 기회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부지런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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