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니까
밥 안 먹는 날은 있어도, 커피 안 마시는 날은 없었다. 눈 뜨면 커피부터 찾았고, 1일 1잔으로 제한하기 전까지는 많을 때는 하루 종일 커피를 물처럼 마셨다. 빡치는 날이면 1.5L짜리 대용량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빨대를 꽂고, 수혈하듯 들이켰다. 여행을 갈 때면 여행지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카페를 일정에 꼭 넣었다. 밥 사주는 사람보다 맛있는 커피 사주는 사람이 더 좋았다. 화나도 커피, 피곤해도 커피, 심심해도 커피, 배고파도 커피, 혼자여도 커피, 함께여도 커피.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늘 커피가 함께했다.
커피 없이 사는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런 내가 커피를 끊은 지 이제 곧 1년이다. 무려 1년! 물론 정말 커피가 당길 때는 가끔 디카페인으로 한 잔 마신다. 여러 번 위기가 있었지만 스트레이트 커피 없이 지낸 1년이라니, 나도 놀랍다. 놀라운 변화의 증거는 여러 가지였다.
커피를 끊은 결정적 계기는 두통과 불면이었다. 중년에 접어들며 몸에 변화가 생겼는지, 커피를 마시면 머리가 아프고 밤새 뒤척였다. 이젠 예전처럼 많은 양을 마시지 않아도, 새끼발톱만큼 정도만 마셔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짜증은 늘고,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커피와 이별을 고했다. 끊은 직후에는 오히려 두통과 불면이 더 심해졌지만 2주쯤 지나자 서서히 가라앉았다. 먼지 낀 유리창을 말끔히 닦아낸 듯 머리가 맑아졌고 잠도 깊게, 빠르게 들 수 있게 되었다. 커피를 끊고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바로 '질 좋은 잠'이었다.
커피를 끊고 가장 허전했던 순간은 식사 직후였다. 밥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는 건 아침이면 눈 뜨는 일처럼 자연스러웠다. 텁텁한 입 안, 더부룩한 속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싸악 내려줬던 그 감각. 습관처럼 마시던 식후 커피가 빠지자 자연스럽게 카페 가는 빈도가 줄었고 덩달아 지출도 줄었다. 1000원짜리 저가 커피부터, 밥값만큼 비싼 커피까지. 식후 커피를 생략하니, 잔지출이 싹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커피값을 모아 저금을 하거나 주식을 사는 건 아니다. 대신 그 자리에 캐모마일, 민트 같은 허브차가 들어왔다. 그래도 10잔 마시던 커피를 3잔의 차로 줄이니, 지갑은 확실히 가벼워졌다.
커피가 좋은 이유는 침이 마르도록 읊을 수 있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여유’였다. 일에 쫓기며 마실 때도 있었지만 커피가 있던 시간의 공기에는 늘 느긋함이 있었다. 그 여유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대신 **차(tea)**라는 세계에 발을 들였다. 차 관련 영상을 찾아보고, 책을 읽고, 숨은 티룸을 찾아다닌다. 티 오마카세도 경험하고, 유명하다는 차를 사서 집에서 우린다. 아직 내 입에 딱 맞는 차를 찾진 못했지만, 흥미는 점점 커지고 있다. 커피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지닌 차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예전엔 **‘커피 없이는 못 산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커피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걸 안다. 좀 심심하긴 하지만, 살 만 하다. 살다 보면 없어선 안 될 것 같은 것들이 생긴다. 커피일 수도 있고, 스마트폰일 수도 있고, 직업, 꿈, 돈, 혹은 인연일 수도 있다. 삶의 필수품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없어도 살 수 있다. 아니, 살아진다. 물론 당장은 괴롭고 힘들다. 애초에 없던 존재였다고 생각하고 빠르게 대체재를 찾으면 삶은 계속 굴러간다. 닫힌 문 앞에서 울고불고한다고 그 문이 열리는 건 아니다. 그 에너지를 아껴, 새로운 문을 찾아 나서는 게 단단하게 살아내는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