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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삐삐 Nov 30. 2023

병은 의사에게

지금 교실 이야기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 증상이 생긴 이래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소통에 관한 강의를 듣게 된 바 전두엽과 전전두피질의 역할과 상관관계를 알게 되었다. 손원평 작가님이 말하는 아몬드가 이 아몬드 -전두엽의 모양- 인 줄도 이제 알았다.

 교사들은 웬만해서 학부모에게 아이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하지 않는다. 통지표에도 생활기록부에도 좋은 말만 -혹시 아니라면, 이건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는 거다- 쓴다. 이것은 불문율이다. 눈치가, 관심이, 양심이, 프로의식이 없어서일까. 방금까지 호의적인 대화를 나누다가도 아이에 대한 교사의 뉘앙스가 약간만 달라져도 학부모의 눈빛이 즉각 바뀌는 걸 직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서적 아동학대로 밀어붙이는 일이 -서이초 사건 이후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는데도 여전하다- 딴 세상 일이 아니다. 누가 얼마나 직을 걸고 -민원이나 소송에 휘말리는 경우 생의 위협까지- 옳은 소리를 하겠나. 지각한 걸 지각했다고 표시하는데도 안 봐준다고 하고 늦잠을 잔 게 확실한데 갑자기 당일에 교외체험학습 신청서를 낸다. 인지상정은 이럴 때 쓰는 말인데 말이.

 

 내가 본 아이는 상대방의 감정을 읽지 못해 타인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교우관계랄 게 없고 모든 게 억울하고 여러 사람에게 불편한 존재이다. 아이 본인은 상황을 전혀 인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 생활이 재밌고 친구들과 장난치는 게 좋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만 즐겁다는 데 있다. 스스로 투사가 되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다투고 상대가 선생님에게 이르고 선생님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패턴이 하루에 몇 건씩 일어나면 이를 컨트롤할 '책임'이 부여된 교사에겐 서서히 번아웃이 드리우게 된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회자되고 학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내년에 그 아이와 다른 반이 되게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나는 해당아이의 부모님과 유래 없이 많은 상담을 하였고 두 분의 고민도 깊었다. 아이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거나 학교를 불신하는 스탠스였다면 나도 방어적이었겠지만 우리는 솔직한 현 상태를 공유하였고 서로 공감했다. 대화는 따뜻했다. 그러나 구상한 해결방법은 서로 달랐다. 나는 병원 얘기를 어렵게 우회해 고 학부모는 우선적으로 병원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이가 스트레스받지 않게 더 부드럽게 사랑으로 기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는 자신의 수치보다 자식의 아픔을 더 크게 느낀다는데 나 자신이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까지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는 바 그 학부모의 망설임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부모로서 자식에게 '내 눈을 바라봐 넌 행복해지고 내 눈을 바라봐 넌 건강해지고' 이 가사를 전적으로 적용하시면 안 되지 않을까. 공부 머리는 있다 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교우관계에 대한 성장이 퇴화되고 있음은 문제인 게 맞는데.. 과연 정답은?


 비통하지만 현 대한민국에서는 예전의 참스승이라는 단어가 돌아오기 힘든 강을 건넌 것 같다. 매해 업무분장표에 학년 신청을 할 때 교내 유명인사들이 포함된 학년은 일단 거리를 둔다. 학교에서 하라면 하는 거고 제비 뽑기에 한 해 운명을 내맡기는 형국이지만 일단은 자신에게 숨 쉴 틈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자리에 이름을 올리는 자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는 엔딩이 된다. 물론 마음 맞는 동료들로 학년을 꾸린 어느 부장의 리더십이 나머지 교사들에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인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는 건 절대 당연할 수 없다. 이것이 교사집단의 이기성 -물론 그런 경우도 있다- 때문인가? 아니. 교사들이 자연 터득한 생존 법칙이다. 일단 학생들을 만나면 교사는 일 년간 그 교실과 관련된 모든 물적 인적 심적 스토리들을 써나가는 역할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스무 명 중에 한 명이 힘들다면 나머지 열아홉에서 위로를 받으라고 하지만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온 우주를 대면하는 일이라는 말처럼 그 한 명은 블랙홀이 될 수도 있다.


 최근 금쪽이 방송에서 오은영 박사님이 아이를 다리로 옭아매는 장면을 보고 현타가 세게 왔다. 현재 학교에는 어떠한가. 수업시간 교과서를 준비하라 했다고 근무 시작 한 시간 만에 고소를 당하는 세상이다. 그 교사는 이제 막 교직에 발을 들인 청년으로 몇 개월의 조사 끝에 혐의 없음을 받았다. 샛별 같은 그 젊은이의 온 마음에 새겨졌을 트라우마는 누가 보상할까. 이를 돌아봐주는 공권력은 없다. 아동학대의 80프로 이상은 가정에서 일어나며 교사들은 매년 아동학대 신고자 연수를 받아야 한다. 청렴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시대 교사들에게 매년 부여되는 청렴연수처럼 그것도 의무연수이며 우리가 왜 이걸 듣고 있어야 하는지 자괴감이 들뿐이다. 눈먼 돈을 크게 해 먹는 윗사람들이나 고소로서 창조경제를 -브로커까지 개입시키는- 이루는 학부모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는 것이 사회정상화에 그나마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법과 규정이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현재 와닿는 변화는 전무하다. 해결할 수 있을까. 누가, 언제, 어떻게? 나와 옆반 선생님과 다른 학년의 여러 선생님들은 오늘도 교실에서 소리를 빡빡 지르고 친구들을 괴롭히고 위험한 장난을 치는 아이로 인해 진로를 고민했으며 아이의 상태를 그냥 지켜만 보는 학부모에게 또 연락할 수 없었으며 힘들어하는 다른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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