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 인터메조, Intermezzo>
우리나라 드라마 역사상 최장수 드라마는 1980년 10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무려 1,088회 방영된 MBC <전원일기>로 기록되어 있어요. 지금도 브라운관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는 김수미, 김혜자, 최불암, 김용건, 고두심 씨는 20대, 30대의 나이에 이미 본인의 나이보다 훨씬 나이 든 역할을 연기했다죠. 특히 일용엄니였던 김수미 씨는 스물여덟 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로 ‘복길이 할머니’ 역을 능청스럽게 연기했다는 사실은 무척 놀라워요. 일요일 아침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아 전원일기를 기다리면 곧 정겨운 시그널 음악과 함께 시작했는데 아무런 관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스카니의 오페라 <Cavalleria Rusticana(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떠올릴 때마다 전원일기의 시그널 음악이 떠오릅니다. 평화로운 시골마을의 풍경이 먼저 머릿속에 그려지고 그 위에 편안한 음악이 흐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오페라 음악 중 가장 유명하기도 한 간주곡(Intermezzo)은 그리 평화로운 장면에 등장하는 곡이 아닙니다만.
제목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시골 기사도’ 정도로 해석이 되는데요. 원작 소설가의 고향이면서 작품의 배경이기도 한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은 지배 계층의 수탈과 전쟁이 잦아 가난한 지역이었습니다. 또 별것 아닌 일에도 가족의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생각하면 결투를 벌여 피의 복수를 하는 등 가족주의가 발달하기도 했고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이러한 시칠리아 지방 사람들의 관습과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별것 아닌 일에, 어처구니없이 목숨 거는’ 시골 사람들의 관습을 비꼬아 ‘시골 기사도’라고 표현했어요. 영화 대부의 돈 꼬를레오네(말론 블란도 役)가 영화 속에서 바로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는데 실제 <대부> 영화에는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음악이 사용되었어요. 영화 <대부>는 주인공인 돈 꼬를레오네의 고향인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하였고 특히 알파치노가 연기한 마이클의 아들이 바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기 때문에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오페라 음악이 흐릅니다.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1막의 짧은 작품입니다. 등장인물의 관계도도 무척 단순하고요. 남자 주인공 ‘투리두’와 여자 주인공 ‘산투차’ 그리고 투리두가 군대 가기 전에 사귀었지만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롤라’, 롤라의 남편인 마부 ‘알피오’, 술집을 하는 투리두의 어머니 ‘루치아’가 있습니다. 주인공 투리두는 이제 막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애인이었던 롤라가 같은 마을의 마부 알피오와 결혼한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다가 자신을 위로해주는 처녀 산투차와 연인 사이가 됩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옛 애인 롤라가 다시 유혹을 하자 투리두는 뿌리치지 못하고 밀회를 시작합니다. 투리두와 롤라가 밤을 보내는 사이 마을의 처녀, 총각들은 시칠리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이때 부르는 합창곡 ‘gli aranci olezzano sui verdi margini(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또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장면이 바뀌고 투리두의 어머니 루치아의 술집에 산투차가 괴로워하며 찾아옵니다. 산투차는 자신의 애인과 롤라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거든요. 산투차는 ‘voi lo sapete, o mamma(어머니도 아시다시피)’란 노래를 부릅니다. 군대에서 돌아와서 롤라 때문에 괴로워하던 투리두를 위로해 겨우 진정시켰는데 이제와 롤라가 다시 투리두를 유혹 한다며 시어머니가 될 루치아에게 하소연을 해요. 롤라와 밀회를 하고 돌아온 투리두에게 산투차는 화도 내보고 간청도 해보지만 투리두는 냉랭한 반응만 보여요. 화가 난 산투차는 롤라의 남편 알피오에게 둘의 관계를 폭로해버리고 맙니다. 알피오는 투리두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둘은 결투를 약속하죠. 투리두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어머니에게 산투차를 딸처럼 보살펴달라고 부탁하고 결투를 위해 떠나요. 결투 장면은 무대 뒤에서 소리로만 들리는데 마을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투리두는 알피오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두고 루치아의 술집에 한 여자가 뛰어 들어오며 투리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루치아와 산투차가 기절하면서 오페라는 막을 내립니다.
1막 작품이기 때문에 실제 오페라 공연의 러닝타임 70여분 정도로 무척 짧은데요. 시칠리아 출신의 소설가 ‘조반니 베르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던 이 작품은 연극으로 만들어지면서 인기를 끌었고 당시 이탈리아의 대형 악보 출판사 중 후발주자였던 손쪼뇨의 1막 오페라 공모에 내기 위해 오페라로 만들어졌다고 해요. 마스카니는 공모 마감일이 두 달 정도 남은 시점에서 공모전 소식을 알게 되어 친구인 대본 작가에게 대본을 의뢰했고 워낙 시일이 촉박했던 터라 대본작가가 만드는 대로 바로바로 마스카니에게 보내면 마스카니는 곧바로 작곡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드라마 쪽대본이 수백 년 전에도 있었나 봐요. 이렇게 급히 진행된 오페라는 공모전 마감일 당일에서야 완성되었다니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시골학교에서 음악교사를 하고 있던 마스카니는 공모전에서 1등을 하며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귀족의 화려한 궁정이나 현실 세계를 벗어난 신화 속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가 많지요. 19세기 말의 이탈리아 젊은 작곡가들은 이런 뻔한 소재에 회의를 느끼고 보다 현실적인 모습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 했어요. 그렇게 서민들의 삶을 소재로 한 ‘베리즈모(극사실주의)’ 오페라가 생겨났습니다.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베리즈모 오페라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넷플릭스 영국 드라마 <브리저튼>이 인기였습니다. 브리저튼을 보고 나서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서 투리두와 알피오의 결투 장면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브리저튼>에서는 여동생과 썸을 타고 있는,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남자가 결혼은 생각이 없다고 해놓고 여동생과 키스를 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결투 신청을 해요. 이게 과연 결투까지 갈 일인가 싶은데 가문의 명예와 여성의 순결을 중시했던 당시에는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부분이었나 봅니다. 참가자 둘 외에 상호 동의 하에 입회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결투를 벌이는데 그 시절 유럽 상류층 남성들의 싸움 방식이었다고 하네요. 결혼을 하지 않은 귀족 처녀가 외간 남자랑 단둘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에 치명적인 오점이 남는다고 여긴 거죠. 이러한 결투(duel)는 보통 새벽에 이뤄졌고 총을 겨누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이 났답니다. anyway,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이 잔잔하고도 평화로운 간주곡은 작품의 긴장도가 최고에 오른 두 남자의 결투 장면에서 흐른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