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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순유 Apr 08. 2021

[내 생애 첫 오페라/사랑의 바보]

<사랑의 묘약 / 남 몰래 흘리는 눈물>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등의 가수가 출연한 ‘놀러와’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어요. 왁자지껄한 대화 가운데 갑자기 통기타 반주에 노래가 흘렀죠. 송창식에서 조영남, 다시 또 송창식...... 한 소절씩 번갈아 부르며 노래는 짧게 끝났지만 스튜디오의 놀란 분위기는 한참 이어졌습니다.



Una furtiva lagrima Negli occhi suoi spunto

Quelle festosee giovani Invidiar sembro

Che piu' cercando io vo Che piu' cercando io vo


외로이 그대 뺨에 흐르는 눈물 어둠 속에 남몰래 흐르네

나에게 무언가 말하는 듯하네 할 말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왜 그때 그대는 떠나지 않았나 왜 그때 난 그렇게 슬퍼했던가




 클래식이나 오페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귀에 익은 선율일 거예요. 송창식 씨는 1967년 쎄시봉의 첫 무대에서 가요도 팝송도 아닌, 오페라 아리아인 이 곡을 불렀다고 해요. 그것도 통기타 반주에.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은 순진한 청년 네모리노가 마을 지주의 딸 아디 나를 짝사랑하며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랑의 묘약을 마신다는 내용의 2막 짧은 오페라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상대방이 묘약을 먹고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묘약을 마시면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이라는 점이죠. 막이 오르면 들판에서 일하던 농부와 여인들이 잠시 그늘에서 쉬고 있고, 마을 지주의 딸 아디나는 다른 쪽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는데 이때 등장하는 책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입니다. 도니제티는 중세의 트리스탄의 전설을 희극의 오페라로 패러디한 것이지요. 순진한 시골 청년의 마음은 노래 가사뿐만 아니라 무대 위의 분장으로도 엿보이는데 마치 전원일기의 순박한 청년들을 보는 듯 푸근하고 친근해요. 네모리노는 멀리서 아디나를 바라보며 ‘quanto bella(얼마나 아름다운지)’ 노래를 불러요. 짝사랑을 소재로 하는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 <사랑의 묘약> 또한 새로운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잘생긴 장교 벨코레가 이 마을에 주둔하게 되었고 벨코레는 아디나를 보고 첫눈에 반했어요. 이 상황을 바라보는 네모리네는 애가 타는데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사랑의 묘약>에서 꽤 비중 있는 감초 역할, 바로 약장수입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하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이 약 한 번 먹어봐!’...... 네, 맞아요. 19세기 초 유럽에도 만병통치약을 판매하는 약장수가 있었나 봐요. 다급해진 네모리노는 약장수에게 찾아가 혹시 사랑의 묘약 같은 것도 파느냐고 묻는데 없을 리 없잖아요. 어차피 어디에 필요하다 해도 처방전은 다 똑같은 만병통치약인데요. 약장수는 순진한 네모리노에게 싸구려 포도주를 사랑의 묘약이라고 속여 팝니다. 그것도 비싼 값에. 플로시보 효과가 있었던 걸까요? 싸구려 포도주를 먹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네모리노는 아디나를 만나 ‘내일이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야!’라고 건방지게 큰소리를 뻥뻥 칩니다.


 마을에 잠시 주둔해있던 벨코레는 다음 날이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합니다. 벨코레는 급한 마음에 아디나에게 오늘 밤에 당장 결혼을 하자는데 건방져진 네모리노를 골탕 먹이려고 아디나는 순순히 받아들이죠. 그때서야 네모리노는 제발 하루만 기다려달라고 애원을 하며 다시 사랑의 묘약을 사러 가지만 이미 가진 돈을 다 써버렸는 걸요. 아디나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 벨코레는 ‘군대에 당장 입대하면 현찰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네모리노와 계약을 하고, 네모리노는 그 돈으로 다시 사랑의 묘약을 사 마십니다. 때마침 동네 처녀들 사이에는 네모리노에게 거액의 유산이 상속된다는 소문이 돌아 그동안 네모리노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처녀들이 온갖 아양을 떨어요. 네모리노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네, 맞습니다. 순진한 네모리노는 사랑의 묘약이 드디어 효과를 발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디나는 약장수에게서 네모리노가 사랑의 묘약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의 절실한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한결같이 자신을 사랑하고 애원했던 그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네모리노가 이 모습을 지켜보며 부르는 노래가 바로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에요. 제목만 들어서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짝사랑하는 그 또는 그녀를 생각하며 부르는 곡 같지만 사실은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나의 마음을 알게 되어 흘리는 눈물’, 기쁨의 노래입니다.


 2012년 tvN에서는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성악 발성의 곡들을 부르는 경연 프로그램, <오페라 스타>가 있었습니다. 김종서 씨는 루치오 달라의 ‘카루소’를, 박기영 씨는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중에서 ‘방금 들린 그대 음성’을, V.O.S 박지헌 씨는 레하르의 오페레타 <미소의 나라> 중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을, 박지윤 씨는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중에서 ‘하바네라’를 불렀죠.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가요 발성과 성악 발성은 많은 차이가 있을 텐데, 게다가 길게는 수십 년 동안 노래를 부른 스타일이라는 게 있을 텐데 갑자기 성악 발성으로 바꾼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요. 비록 프로그램은 종영되었지만 지금도 종종 대중 가수들이 불렀던 오페라 아리아가 떠오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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