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에 그림책도시가 있었다. 그림책에 매혹된 사람 하나가 이제 막 읽기를 끝낸 백열한 권째 그림책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탄식했더란다.
그 탄식이 마침 아이 손을 잡고 세상을 보여주러 지나가던 이한테 들렸고, 그림책을 넘겨받아 아이와 함께 넘겨보던 그도 탄식했다. 그 속에 온 세상과 온갖 이야기와 온갖 그림이 들어있는 것에 놀라고 또 놀랐다. 아이도 세상에 자기를 위한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발을 쿵쿵 구르며 기뻐했다. 아이와 어른은 저쪽 모퉁이에 앉아 울고 있는 이에게 가서 그림책을 읽어주었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모두가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겪었던 일도 그림책으로 만들면 흐뭇한 이야기가 되리라, 깨달았다. 그렇게 그림책이 발이라도 달린 듯 온 도시를 돌고 도는 사이 그림책에 매혹된 이들이 자꾸자꾸 늘어나면서 멋진 그림책을 모아놓고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집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그러자 온 도시 곳곳에 그림책도서관들, 그림책 주인공의 요리와 빵과 차를 먹을 수 있는 그림책카페, 그림책 만드는 공방, 그림책 연구소와 미술관과 박물관이 그득해졌다. 이 그림책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 어른들 누구나 그림책작가의 지도를 받으며 자기 이야기로 그림책을 만들었고, 그런 그림책으로 또 하나의 그림책도서관을 그득 채우고 채웠다. 먼 나라 이웃 나라에서 그림책도시와 그림책도시에 사는 이들을 보러 오는 나그네들이 줄을 이었다….’
그림책도서관과 그림책도시 얘기를 20년 가까이 백만 번이나 천만 번쯤 읊조렸을까. 그러느라 너무 오래 걸어둔 벽걸이 태피스트리, 가장자리 실이 풀려 나달거릴 만큼 낡아서 옛이야기가 되었다. 더구나 이야기를 듣고 옮기면서 이야기꾼 취향대로 기분대로 그때그때 조금씩 변개되어 ‘그림책도시 이야기’ 이본(異本) 또한 수두룩해졌다.
실화 ‘그림책도시 이야기’ 첫 시작 대목을 건너뛸 수가 없다. 이 일이 싹 트고 잎 내고 가지 뻗은 씨앗 대부분이 이 대목에 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간략한 버전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그림책에 푹 빠져 지내던 사람 하나가 낡은 버스 한 대를 구해 그림책버스를 만들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그림책 읽어줄 의욕으로 안달이 난 채 어찌어찌 원주로 이사한 때가 2001년 11월.
지역 독서운동가의 소개로 도서관의 열정 공무원과 ‘그림책버스’ 상상을 공유하다가 그림책 전문 활동가 양성 과정 ‘그림책(어머니)교실’과 그림책 읽어주는 ‘그림책버스’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이 2003년 6월.
12월에 수료한 그림책 전문 자원활동가 1기 10여 명과 폐차장에서 고철이 될 찰나의 버스를 구해 볕 잘 드는 공원에 끌어다놓고 작가들과 출판사 대표들과 편집자들에게 도움을 청해 그림책을 모으는 한편 원주시 문화체육과 공무원들과 지역 유지들이 이모저모 실내 공간을 감당하고 프뢰벨러스트 그림책작가들이 2박 3일 외관 도색 및 이미지를 담당해 ‘그림책 전문 작은 도서관 패랭이꽃그림책버스’를 개관한 것이 2004년 5월.
김서정·김지은·박윤규·이경혜·이금이·황선미·이상희가 쓴 동화에 유문조·한성옥·한태희·윤미숙·김종민·김석진·이형진이 그림을 그려 패랭이꽃그림책버스에 인세 전액을 후원하는 옴니버스 동화집 『달려라, 그림책버스』(문학과지성사 / 책 말미에 패랭이꽃그림책버스 건립 과정과 협력자들의 이름이 등장한다)가 나온 것이 10월이었다.
이후 패랭이꽃그림책버스는 지역 아이들과 양육자들이 즐겨 찾는 흥미진진한 공간으로, 무엇보다 그림책 전문 활동가들이 선험적 전문성을 차곡차곡 축적하고 그림책의 일상 예술성을 각종 행사와 프로그램으로 시민들과 공유하는 협력과 연대의 문화실험실로 성장해갔다. 고철 버스에서 좌석을 떼어내고 기다랗게 서가를 설치한 작은도서관이지만, 한 권 한 권이 미술관이라는 그림책이 그득했고, 더 필요한 것도 없고 그보다 더 좋을 필요도 없이 충만했다. 그곳이 그림책도시였고 그림책나라였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재활용 구조물은 노천의 햇볕과 비바람과 눈을 견디는 지속가능성이 약했고, 얼룩지고 지워진 그림책 주인공들을 다시 그리는 세 번째 작업을 고민하느라 그림책버스를 샅샅이 들여다보고 내려다보고 둘러보던 2010년 초봄에 더 이상 안전성과 미감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마음속으로 폐관을 결정했다. 그리고 ‘미감과 내구성을 갖춘 그림책전문도서관’이라는 새로운 필요가 생겼다.
개관 10년이 되는 5월에 원주시 예산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미 ‘그림책도시’라는 명칭으로 그림책전문활동가들이 제안한 사회적기업 및 사회적협동조합 설립을 준비하던 참이었지만 공공연히 ‘그림책도시’ 개념을 언급한 것이 이때였지 싶다. 1부 그림책이 보여준 길, 그림책도서관에서 시작되는 그림책도시(이상희), 지역사회를 세계 명소로 만든 세계 전문 도서관 이야기(안찬수), 그림책 문화의 미래 가치(천상현). 2부 그림책의 세계(김서정), 그림책, 일상예술(곽영권), 그림책이 사는 집, 그림책 도서관을 위한 건축 철학(강예린), 지역사회를 키우는 전문 도서관의 힘(최진봉), 그림책 전문 꼬마도서관 패랭이꽃그림책버스 10년, 작고 단단한 씨앗(엄은희) 등 다양하고 간절한 발제로 이어진 세미나는 그림책전문도서관을 상상하면서 한국의 그림책 출판 생태계까지 조명했다. 원주 시민들과 그림책전문활동가들, 전국 곳곳에서 온 그림책작가들, 연구자들, 도서관 관계자들, 지자체 관련 부서 공무원들이 나란히 앉아 같고도 다른 그림을 그렸다.
특히 ‘군사도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역 내 문화 가치에 집중하고 있던 원주시는 세미나 이후 여러 차례 그림책전문도서관 건립 계획과 착공 뉴스를 내는 한편 패랭이꽃그림책버스가 축적한 그림책 문화 활동과 시민 공유 성과를 문화도시 조성 계획 포트폴리오의 주요 항목으로 제출해 ‘2016년 그림책특화 문화도시 지정, 2018년 문화도시 예비도시 지정, 2019년 10월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지정, 12월 문화도시 지정’이라는 일련의 도시 브랜드를 갖게 된다.
“…원주는 군사도시 이전에 문화와 행정도시였다. 물론 삼국시대부터 전략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에 군사도시의 특성도 계속 있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통일신라시대부터 북원경,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다만 한국전쟁 이후 1군사령부가 주둔하면서 냉전의 시대 동안 군사도시 이미지가 강해졌고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다시금 문화, 행정, 교육, 경제도시의 이미지로 변화해 가고 있다. 2003년에 원주시 문화예술중장기발전계획 수립은 문화적인 관점을 가지고 도시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사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후 원주는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으며 2010년 원주문화재단의 출범과 함께 2013년 원주문화비전2020을 수립, 중부내륙권 중심 거점도시로의 발전에 따른 문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비전을 2020년을 목표로 설정하게 된다. 이때 제시된 생명인문학도시, 문화를 통한 원도심활성화, 지역문화포럼, 청년지역문화학교, 문화도시 지정, 문화재단의 운영활성화 등이 이루어졌다. (…) 2015년 문화특화지역공모사업에 그림책 특화 장르로 제출하여 원주문화재단 테스크포스팀을 중심으로 2016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에 돌입하게 된다.” (‘원주는 어떻게 창의·문화도시가 되어가고 있는가’, 전영철, 『원주신문』 기사 발췌)
원주는 지난해에 이어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더없이 분주하다. 올해는 2016년에 지정된 그림책문화특화지역사업이 종료되어 ‘그림책’이 머리에 붙는 사업이 마무리되고 그림책이 내적으로 작동하는 ‘문학창의도시’와 ‘문화도시’로 건너가는 시점이다. 이담 그림책여행센터·그림책문화학교 등 원주문화재단이 맡았던 그림책특화사업을 승계하는 원주시의 실행협의체로서 원주 창의문화도시지원센터가 설립되어 문화도시사업 추진 및 도시문화 활성화, 지역문화진흥 관련 도시문화 업무를 총괄하고 지역공동체의 자발적인 참여와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중간 지원 조직으로 가동되고 있다. 최근 그림책도시 2기 추진전략 수립을 위한 오픈테이블을 열면서, 원주그림책포럼을 기획한 창의문화도시지원센터 김선애 국장은 이 단계가 사실상 원주의 그림책도시 3기로, 2004년 패랭이꽃그림책버스 개관 시점을 그림책도시 1기로 봐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림책이 원주를 대표하는 콘텐츠가 된 배경에 패랭이꽃그림책버스와 사회적협동조합 그림책도시의 힘을 환기시켜준 것이다.
지금 패랭이꽃그림책버스 17기 회원들은 56회 이유정 작가 초청 강연회를 위한 비대면 오픈스터디를 가동 중이며, 연말의 수료식 준비도 아우르고 있다. 사회적협동조합 그림책도시 또한 일상적인 그림책 예술교육 및 출판과 전시 참여 업무에 아울러 내년 개관할 그림책센터 수탁 준비 회의에 여념이 없다. 와중에 원주 창의문화도시지원센터가 던지는 질문에 답을 찾고 다시 질문하면서 그림책이 더욱 가치 있고 효율적인 일상예술 시민 문화로 향유될 수 있는 길을 나란히 모색하고 있다.
이상희_시인·그림책 작가, 패랭이꽃그림책버스 회원, 사회적협동조합 그림책도시 이사장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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