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부인과의 인터뷰

되찾아야 할 사냥꾼의 화살

by 행복한독서

L 부인과의 인터뷰

홍지혜 글·그림 / 52쪽 / 16,000원 / 엣눈북스



자고로 사람 사는 집에는 L 부인이 한 명쯤 있기 마련입니다. 차향이 머문 거실과 말끔하게 정돈된 방, 보송보송한 이부자리와 잘 마른 옷가지들, 아름다운 주황색 카펫. 일상의 평온과 미적 감각은 부인이 매일 노동으로 어렵사리 쟁취해내는 것이죠. 집안일은 요리와 빨래, 청소, 정리 정돈, 수선, 수리, 택배 받기에 이르는 전방위 노동입니다. 그래선지 책에서 L 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집안일은 사방에서 한꺼번에 터지더라구요.”

놀랍게도 한 번에 여러 일을 하는 ‘멀티태스킹’ 능력을 요하는 집안일은 심지어 뇌의 창의성까지 약화시킨다고 해요.


물론 우리 집에도 소중한 L 부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출판도시와 글쓰기 숲을 헤매는 사냥꾼 늑대로 십여 년을 살아왔지만, 지금은 자유롭고 용맹한 늑대의 삶을 접었습니다. 멋진 시구로 꽉 차있던 L 부인의 머릿속엔 일주일간의 식사 메뉴와 요리법, 장보기 목록이 자리 잡았지요. 건강하게 살기 위해 매실청과 열무김치, 된장을 담그거나 금세 쌓이는 설거지를 감당하느라 부인의 손은 곧잘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흔한 일기 몇 줄 쓰는 일도 이젠 호사로 느껴진다고 해요. 이 책에서 L 부인의 일기장이 싱크대 속 물 안에 떠 있는 까닭도 마찬가지 의미가 아닐까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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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가 함께 생존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을 잠시 잊고 살아야 했던 늑대, 낯선 곳으로 여행 가길 좋아하고 활자 중독에 빠져 매일 새로운 책을 탐색하던 창의적인 사냥꾼, 하지만 지금은 사방에서 터지는 집안일에 치여 함께하는 삶에 지쳐가는 나의 소중한 L 부인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더 큰 숲을 가로지르는 꿈을 응원하게 합니다.


“찾았다!”

책 속 L 부인의 한마디 외침이 반갑습니다. 먹잇감을 놓치는 법이 없는 명사수의 눈으로 부인이 발견한 건 거울 속 지칠 대로 지친 자신의 모습이었어요. 왜 부인은 생기를 잃은 껍질 속에 갇혀 있었을까요? 세 가족이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란 그녀 자신의 이상 탓일까요? 아니라면 그녀가 아이 보기와 집안일, 바깥일을 병행할 수 없도록 꽉 막힌 사회구조의 탓일까요?


『L 부인과의 인터뷰』는 생활 전반이 나아져도 좀체 움직이지 않는 성 역할에 작은 의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합니다. 강인하고 멋진 늑대 부인들이 자기 성향을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도록 우리 숲의 생태계가 보다 다양하고 포용력 있는 곳이 되길 바랍니다.


노유다_도서출판 움직씨 공동대표, 『햇볕 동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8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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