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은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림책 속에는 대체로 누구에게 바친다는 글이 있습니다. 이수지의 글 없는 그림책 『파도야 놀자』(비룡소)의 표지를 열면 이런 헌사를 만나게 되지요. "나의아기, 산에게.”
존버닝햄은 『비밀파티』(시공주니어)에 “작은 것들에게”라고 써두었습니다. 엘사 베스코프는 각각의 장면 모두에 자신의 이름을 뜻하는 이니셜 ‘E. B’를 넣은 그림책 『펠레의 새 옷』(비룡소)을 만들어 아들에게 주었지요. 자녀가 여럿인 펠릭스 호프만은 『찔레꽃 공주』 『행복한 한스』 『엄지 동자의 모험』(비룡소) 같은 옛이야기 그림책을 만들 때마다 자녀들 가운데 한 아이의 이름으로 헌사를 바치면서, 그 아이가 좋아하는 고양이와 케이크를 장면 곳곳에 그려 뒀습니다.
바버러 쿠니가 만든 거의 모든 그림책에도 헌사가 있습니다.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힘차게 자라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루어달라는 뜻의 축하와 감사 기도를 담은 거지요. 이처럼 그림책을 쓰고 그리고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일은 결국 선물을 만드는 일이 되고, 훌륭한 그림책을 고르는 일과 정성껏 읽어 주는일, 그림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하고 널리 나누는일 역시 선물이 됩니다. 그래서 저절로 그림책은 예술품입니다. 재능과 정성을 다해 만드는 선물은 틀림없이 내적·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마련이고요. 그 과정 또한 자연스럽게 예술활동이됩니다. 물론 그 결과물도 예술품이지요.
또 그림책은 시(詩)입니다.
예술에는 대개 시의 세계가 함유되어 있어요. 시인이나 화가가 예민하고 순정한 감각으로 세계와 사물을 관찰하고, 그 느낌과 감흥의 고갱이를 자신만의 개성적 표현으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날마다 사물과 풍경을 처음 접하고 인지하고 감각하면서 자기만의 옹알이로 인사를 건네는 점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면을 훌륭한 이야기와 그림으로 엮어 담은 그림책이 시라면, 아이의 눈앞에서 그림책을 펼쳐 보이고 나란히 즐기며 공감하는 일은 시적인 행위이자 시를 향유하는 시간입니다.
그림책을 자주 접하는 서너 살 안팎의 한 아이가 있습니다.
어제는 엄마와 함께, 그제는 아빠와 함께 그림책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그제 어제와 달리 오늘 엄마가 읽어준 그림책을 보면서 비로소 그림책의 감흥에, 이야기의 한 장면에, 주인공의 모습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 이 그림책이 아이에게 첫 책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그림책은 필시 어떤 어린아이의 첫 책이 되는 법이지요.
아이는 이 그림책에서 본 대로 세상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책이 보여준 등장인물의 모습을 마음에 품게 되었지요. 한 아이에게 다가온 첫 책이 근사한 이야기와 멋진 그림을 보여줄지, 하찮고 졸렬한 이야기와 그림을 보여줄지는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과 고르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아이는 그 첫 책에서 근사한 이야기와 멋진 그림을 본 덕분에 오래도록 책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이 되겠지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가 있습니다.
첫 수업 시작 전에 선생님이 그림책을 읽어주었는데, 온종일 그 이야기와 그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파란 색종이를 찢어 붙인 파랑이와 노란 색종이를 찢어 붙인 노랑이, 두 친구가 기뻐서 꼭 끌어안았더니 그만 초록이들이 되는 바람에 부모님들이 못 알아봐서 엉엉 울고는 다시 파랑이와 노랑이가 되어 행복해진 이야기….
마음에 꼭 드는 그 이야기를 아파트 위층에 사는 친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 이야기와 그림 그대로 말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아이는 우연히 도서관에 가면 그 그림책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집에 빌려 가면 위층 친구와 함께 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지요. 그 뒤로 아이는 도서관의 단골 이용객이 됩니다.
아빠가 된 지 얼마 안 된 시인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기를 돌보느라 그림책을 펼쳐 들었어요. 자기가 읽어주는 것을 아기가 좋아하는지 아닌지에만 신경 쓰던 아빠는 순간 깜짝 놀랍니다. 동물원에 사는 동물을 보여주는 이 그림책 장면 하나하나가 더없이 회화적인 것은 물론이고, 짤막하고 간단한 문장이 재치 있고도 유머 넘치는 시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지요. 아빠는 그림책을 한 권 한 권 계속 읽어나가고, 아기는 멋진 그림과 글에 감동한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며 새근새근 잠에 빠져듭니다.
한 할머니가 있습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그림책 읽어주는 시간에 매혹되었습니다. 그림책 공부를 하고, 그림책 워크숍에도 참여하고, 그림책 읽어주는 자원활동가 모임에도 나가며 두근두근 가슴 뛰는 나날을 보냈지요. 이런 멋진 경험을 혼자만 누릴 수가 없어 친구들에게도 알려주느라 더욱 분주해졌습니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는 으레 가방 속에 넣어 간 그림책을 읽어주곤 합니다. 할머니의 친구들은 이제 그림책에 대한 이야기를 주된 화제로 삼게 되었지요. 아들 집에 들른 어느 날, 가방에서 그림책을 꺼내어 고등학생 손녀에게 읽어준 뒤로 할머니와 손녀는 그림책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림책의 가장 큰 미덕은 이 멋진 예술품을 아이와 어른이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린이독자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다 해도 훌륭한 그림책이 품고 있는 예술성 덕분에 각 세대가 저마다의 경험 층위에서 누릴 것들이 넉넉하기 때문이지요. 그림책 한 권을 잘 고르면 삭막한 지시어만 오고가기 마련인 따분한 나날 속에서 가족들이 각자가 읽은 그림책에 대해 시적인 문장을 인용하며 공감을 나눌 수 있습니다. 식탁 한쪽에 펼쳐 세운 그림책 속 한 장면을 나란히 바라보는 멋진 일상을 경험할 수 있어요. 마음을 고양시키는 그림책 한 장면, 지금 창밖의 풍경을 그대로 자연과 도시를 노래하는 그림책 한 장면, 거듭 되뇌고 싶도록 근사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는 그림책 한 장면을 집안 곳곳에 펼쳐보세요.
이상희_시인, 그림책작가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6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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