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예술 ‘그림책’

그림책깊이읽기

by 행복한독서

변화무쌍한 예술 장르의 분화와 생성

인간은 생명 에너지를 동력으로 끊임없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자극에 내적 반응을 하며, 어떤 동기에 의해 활동한다. 『인간의 모든 동기』의 저자 최현석 교수는 마음이 작용되는 동기를 마음·욕구·자아·신념·의지·재미·관계·인정 등으로 분석했다. 인간의 이러한 동기가 외부 자극과 만나며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표현한 것이 예술의 기원이 되었다. 자연에 많이 노출된 원시시대에는 주술적 목적으로 시·노래·무용이 합한 형태였다가 그 후 문학·음악·무용으로 분화되었고, 기술 발달과 함께 사진·영화·만화 등이 더해져 오늘날과 같은 예술 장르의 조합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예술 장르는 변화무쌍한 외부 자극과 인간의 반응에 따라 분화되고 생성되면서 우주와 인간의 기원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을 담아왔다.

장르는 라틴어 ‘게우스(genus)’에서 유래한 말로 ‘종류’라는 뜻이다. 공통된 특징을 지닌 것들을 묶고 나누는 행위는 어떤 질서를 찾으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자유롭게 뒤섞여 있는 삶을 제한된 에너지로 살아내야 하는 인간에게 효율적인 소비란 필연적 동기일 것이다. 다만 동기는 활성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속박된 시선을 내포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공존, 융합 시대의 예술

나누고 분류했던 시대가 가고, 당대를 공존과 융합의 시대라고 한다. 문화·예술 분야에도 장르, 학제 간 경계의 붕괴가 두드러졌으며 정체성이나 정의를 거론하던 예술 ‘도그마(dogma, 독단적 신념이나 학설)’는 더 이상 권위나 관심의 대상을 떠난 지 오래다.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한 현상이겠으나, 20세기 초에 완성된 현대물리학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의 영향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이 두 이론은 이전의 고전물리학을 기반으로 한 사물의 이치를 완전히 잠식시키는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이 같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 존재 방식의 재발견은 3차원 시공간을 4차원 시공간으로 이해하게 했다. 자연현상이 일상 경험과 일치해 인과적인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하게 예측 가능하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또 동일한 속성도 측정하는 상황에 따라 변하고 바뀌는 전환을 일상에 수용하려는 안목도 생기게 되었다. 수십 년이 흐른 후 변화된 인식은 자연과학은 물론 철학·종교·심리학·사회학·예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연관성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고 새로운 시선과 해석을 낳기도 했다.

현대 과학이 자연 원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인식과 관념의 문제까지 다루게 되면서 과학·철학·종교의 중첩된 영역은 점차 ‘탈경계’를 이루었다. 자연세계는 물론이고 인간세계도 어떤 사물이나 인간이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사물이나 인간과의 관계로 존재한다는 세계관에 동의하게 되었다.


예술 주체의 전환과 상호 모색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은 소통의 물리적 범위 확장뿐만 아니라 문화 간 전달 방식이 한쪽으로 병합되지 않고 교류·교합·전환되는 현상을 확인해주었다. 이렇게 문화 또는 대상과의 교섭과 상호 이해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이끌어내는 탈경계적 특성은 예술 주체의 전환과 상호성에 방점을 둔 인터랙티브(interactive)형 작품들을 통해 확산되었다. 경계를 세움으로써 존재를 확인하던 인식에서 벗어나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이동으로 예술의 영역이 확장되었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미술에서도 조형 언어의 고정관념과 시각 장르의 한계성을 배척하고, 작가와 관객을 독립된 예술 주체로 인식하며, 전문가 집단과 대중 사이의 간극을 허물기 시작했다. 또한 상업성과 순수성, 예술품과 일반 사물의 가치 구분을 해체하면서 자유롭게 상호 왕래하는 재조합, 통합, 통섭과 같은 다른 가치를 제안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의 여정에 ‘그림책’이 있다. 시각언어와 문자언어 그리고 페이지라는 간(間)과 엮음이라는 요소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시공간에서 작가와 독자의 상호성에 따라 작품이 완결되는 그림책은 이미 탈경계의 속성을 담기에 최적의 조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잠재력과 가능성을 확장한 그림책

다음에 소개하는 세 작품은 그들의 사유를 새로운 그림책 언어와 어법으로 제안하며 경계를 구체화하거나 교차하고 가로지르며 그림책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복잡다단하고 예측하기 힘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을 초청해 작가의 의도로 통합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술 주체의 상호성을 수용하고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하게 하려는 의지를 만날 수 있다.


『흰 눈』 공광규 시 / 주리 그림 / 바우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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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은 // 매화나무 가지에 앉고 // 그래도 남은 눈은 / 벚나무 가지에 앉는다.”

시인의 사유로 시공간이 재창조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겨울의 흰 눈과 제 시절에 피는 흰 꽃을 하나로 볼 수 있는 작가의 통찰은 질량, 공간, 색, 물질 등의 가시적 세계와 에너지, 시간과 같은 비가시적 세계의 경계를 허문다. 모든 존재를 하나로 묶어 우주 안의 것들을 한 생명체인 유기적 공동체로 관계하게 한다. 이로 인해 독자는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사이를,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자유롭게 왕래하며 사유의 영역이 확장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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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 조선경 지음 / 썸북스

그림책의 물리적 구조와 물성을 해체하고 통섭한 작가의 영민한 안목이 놀랍다.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다양한 존재들이 만나고, 책의 양면이 나란히 맞닿아 놓이게 되면 서로의 관계가 형성된다. 수작업으로 제본한 덕에 양면을 각각 따로 펼칠 때마다 수없이 다른 조합을 즐기는 호사를 누린다. 또한 조합의 배치에 따라 세상의 모든 접촉과 관계가 상징되는 놀라운 확장성이 제안된다. ‘엮음’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수작이다. 글이 없어 독자의 자유로운 사유를 담보한다. 두 존재의 접촉을 보면서 ‘Kiss’의 다양한 해석을 나누는 것도 즐겁다.


『하이드와 나』 김지민 글·그림 / 한솔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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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북 구조다. 표지부터 페이지마다 뚫린 프레임을 통해 다른 페이지의 이미지가 보이도록 구성했다. 책을 펼쳐서 세워놓으면 이미 그 자체로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된다. 또한 어떻게, 얼마나 펼쳐졌느냐에 따라 달리 형성되는 물리적 공간이 사유 공간으로 전환된다.

뚫린 페이지 프레임을 통해 보이는 이미지의 변화가 메시지에 힘을 실어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유희적 즐거움을 호출해 진지하나 부담스럽지 않게 관계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작가의 발상에, 또 만만치 않은 제작을 과감히 감행한 출판사의 용기에 아낌없는 격려를 보낸다.


한성옥_작가, 그림책협회장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7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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