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만들어내는 형형색색의 숨 방울

by 행복한독서

“네가 내쉬는 숨이 더 넓은 세상으로 갔으면 해.”

“네가 내쉬는 숨이 더 많은 존재들을 웃게 했으면 해.”

부드러운 분홍빛 색색의 공간에아이의 첫 숨이 방울방울 피어오릅니다.

숨과 숨이 만나 또 다른 숨을 만들어내는 기적의 순간입니다.



노인경 지음 / 64쪽 / 16,000원 / 문학동네


한 아이가 분홍빛 웅덩이 속으로 풍덩 들어가요. 물속엔 두 어른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어요. 아이는 첫눈에 두 사람이 엄마와 아빠임을 알아차려요. 마법의 열쇠를 열듯 엄마 아빠 사이로 들어간 아이는 첫 숨을 내쉬어요. 아이의 숨은 방울방울 뿜어져 나와요. 아이의 숨 방울들은 작은 물고기가 되고, 아이의 손짓이 더해지자 또 다른 새로운 생명체로 변해요. 셋이 헤엄치기 시작하자 더 많은 물고기들이 생겨나 그들을 따라가요. 아이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요. 아이의 부모도 그럴 거예요. 부모는 아이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셋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분홍빛 바다에서 색색의 먼 우주까지 자유롭게 이동하며 수많은 생명을 만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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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다시 분홍빛 웅덩이에서 눈을 떠요. 파란 하늘과 투명한 공기가 아이를 반겨요. 아이는 웅덩이에서 나와 힘차게 엄마와 아빠를 향해 달려가요.


저한테는 세 돌이 조금 넘은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에게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어땠는지 자주 물어봤어요. 아이는 귀엽게 웃더니 “재미있는 거 많았어. 좋았어”라고 하더군요. 이 대화가 그림책 『숨』의 시작이에요. 아이 말대로 엄마의 배 속 세상은 닫힌 공간이 아닌 끝없이 넓어져 가는 열린 공간이었을지 모른다고 상상했어요.


이 책을 기획하기 전에 다른 책을 만들고 있었어요. 한 아이가 포클레인을 타고 엄마를 찾는다는 내용이었어요. 사실 아이가 가는 길은 엄마의 몸이고요, 그중 엄마 배꼽에 도착해 아이가 수영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 장면은 저에게 여러 상상을 하게 했어요. 배꼽 수영장은 끝없이 깊어 그곳으로 내려가면 생명의 시원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결국 포클레인 책을 접고 『숨』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책을 만들면서 고민과 갈등과 선택은 매 단계마다 있었어요. 캐릭터, 채색 방법, 표지 등 모든 것이 처음 생각과는 달라졌어요. 바뀌지 않은 건, 제목뿐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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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람의 형상과 가까웠던 인물들은 물고기와 인간의 몸이 섞인 실루엣과 만화적인 얼굴로 바뀌었고, 색지 위에 뭉툭한 색연필로 그렸던 그림은 트레이싱페이퍼를 이용하는 것으로 바뀌었어요. 트레이싱페이퍼는 배경 표현이 자유롭고 물속의 몽환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인물들의 움직임과 표정을 살릴 수 있는 채색 방법이었어요. 고운 질감의 색연필로 많은 색을 채워 배경을 만들고, 반투명한 트레이싱페이퍼로 덮은 뒤, 그 위에 인물들을 그렸어요. 숨 방울들은 트레이싱페이퍼를 한 장 더 올린 다음 그 위에 그렸고요.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등 활력이 넘치는 색을 선택했어요.


표지는 인쇄 이틀 전에 바뀌었어요. 화려하고 시선을 끄는 표지 그림을 그렸었는데, 본문의 느낌을 잘 보여주는 지금의 표지로 다시 그렸어요. 과정 중에 바뀐 것이 많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변화는 엄마, 아빠, 아이 셋이 함께 숨 방울을 만들어내는 설정에서 아이 혼자 만드는 것으로 바꾼 거예요. 덕분에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주도적이고 씩씩한 아이가 이끄는 이야기로요.


『숨』은 처음부터 글 없는 그림책으로 만들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다 만들고 보니 책이 조금 불친절한 게 아닐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모든 장면에 글을 넣어봤어요. 확실히 쉽고 다정해졌지만 매력이 줄어들었어요. 무엇보다 상상의 영역이 사라지며 그림책 속 세상이 아주 좁아져 버렸어요. 결국 썼던 글을 다 빼고 맺음말에 녹여 넣었죠. 면지는 셋이 해변에 누워서 함께 올려다보는 하늘이면 좋겠다 싶어 수채화로 쓱쓱 그렸어요. 파란 하늘에 구름처럼 아이와 엄마의 대화를 둥둥 띄웠고요. 이런 면지 구성이 본문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책을 좀더 친근하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만드는 과정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생명이 피어나는 과정을 즐겁고 편안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담아내고 싶었던 첫 마음을 잊지 않으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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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숨을 불어넣는다’는 말을 좋아해요. 마치 생명이 탄생하는 마법의 순간 같아요. 부모는 10개월 동안 아이에게 숨을 불어넣고, 그 숨을 받으며 준비를 마친 아이는 마침내 세상에 나와 스스로 숨 쉬게 되지요. 작은 점만 했던 태아가 큰 아이로 자라나듯, 아이가 내쉬는 작은 숨 방울은 물고기가 되고, 고래가 되고, 우주를 만들어요. 아이를 품었던 시간만큼 아이를 길러내는 시간도 어렵고 막막할 때가 많아요. 믿고 기다리면 스스로 커가는 아이와 만날 수 있다는 걸 조금씩 배우고 있는 요즘이에요.


아이가 만들어내는 새롭고 아름다운 숨 방울을 매일 볼 수 있음에 설레고 감사해요. 우리 안에서 꽃핀 새로운 생명과 자유롭게 여행하며 웃음이 가득한 우주로 나아가고 싶어요.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에겐 용기를, 육아에 지친 부모에겐 위로를, 아이를 다 키운 부모에겐 추억을 가져다주는 책이었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색으로 자유롭게 숨 쉬는 책이 되길 바라요.



노인경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이탈리아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림책 『곰씨의 의자』 『나는 봉지』 『고슴도치 엑스』 등을 쓰고 그렸으며, 동시집과 동화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책청소부 소소』로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 2012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되었고,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로 2013 브라티슬라바국제원화전시회(BIB) 황금사과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8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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