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첫 번째 그림책 『수영장』과 두 번째 그림책 『문』은 글 없는 그림책입니다. 어떤 독자들은 글이 없어 이 책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당혹스러워합니다. 글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얘기도 듣고는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히려 글이 없어 더 쉽게 소통할 수 있었다는 독자들도 있습니다. 이따금씩 해외 독자들에게 메일을 받습니다. 한국의 그림책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제 책이 글이 없기 때문에 더 쉽게 접할 수 있었다고요. 제 그림책이 언어를 초월해 여러 나라 독자들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텍스트가 없었기 때문인 거지요. 그러니까 제 그림책과 소통하기 어려웠던 건 단지 텍스트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아마도 글이 없어 당혹스러우셨다면, 텍스트를 읽는 것에만 익숙해져 그림이 가진 많은 이야기들을 놓쳤기 때문은 아닐까요?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림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글이 없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림 속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즐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그림에 담겨 있는 은유나 상징과 같은 이야기들을 찾아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로 쓰인 문학작품과 마찬가지로 그림에도 은유와 상징, 묘사의 아름다움,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에 조금만 익숙해진다면 더욱 다양하게 그림책을 즐길 수 있게 될 거라 생각됩니다.
글 없는 그림책을 몇 권 살펴보겠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은 말 그대로 그림으로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그림책입니다. 그림은 글과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눈사람 아저씨』 『이상한 화요일』 이런 책들을 편의상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성격을 가진 책들이라고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성격을 가진 그림책의 경우, 그림 혼자 스토리텔링을 하다 보니 글이 있는 그림책에 비해 그림이 보다 구체적이고 장면의 흐름이 보다 더 자연스러워집니다. 마치 영화 필름을 보는 것처럼요. 독자들은 무성영화를 보는 것처럼 스스로 지문과 대화를 떠올리면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눈사람 아저씨』 레이먼드 브리그스 지음 / 마루벌
너무나 유명한 작품입니다. 눈 오는 날 한 소년이 자신이 만든 눈사람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소년의 설레는 마음, 눈사람을 만들어나가는 과정, 눈 오는 날의 공기 등 각각의 장면들을 그림이 정성스럽게 들려주어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눈사람 아저씨와 주인공 소년의 즐거운 대화를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꿈을 꾸듯 아름다운 그림들은 독자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고 먼 세계로 데려갑니다.
『이상한 화요일』 데이비드 위즈너 지음 / 비룡소
그림이 형성하는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풍부합니다. 줄거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어느 밤, 개구리들이 마을을 찾아왔다가 동틀 무렵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림들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기이하게도 개구리들이 연잎을 타고 날아와 빨래를 엉망으로 만들고 잠든 할머니 몰래 텔레비전을 보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 모든 풍경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초현실적인 느낌을 줍니다. 데이비드 위즈너는 다른 책들에서도 이러한 초현실주의적인 표현들로 평범한 일상을 낯설게 보고 다시 보게 만듭니다.
문제는 『줌, 그림 속의 그림』 『시작 다음 Before After』와 같은 책입니다. 저는 이런 책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계속 질문하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페이지를 넘겨 가면서 다양한 맥락을 통해 장면을 읽어나가고 이해하게 되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다양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때로는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줌, 그림 속의 그림』 이슈트반 바녀이 지음 / 보물창고
불가사리 같기도 하고, 추상화 같기도 한 그림이 페이지에 가득 차 있습니다. 다음 페이지를 넘겨보면 그것이 닭의 벼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다음 페이지에는 그 닭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점차적으로 카메라를 줌아웃 해 나갑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생각의 경계를 넘어 계속해서 반전을 선사합니다. 읽는 즐거움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느끼게 되지요. 크게만 느껴지던, 내가 알던 세상이 사실은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놀라움과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 「인셉션」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시작 다음 Before After』 안느-마르고 램스타인, 마티아스 아르귀 지음 / 한솔수북
얼핏 책장을 넘겨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책인지 알 수 없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천천히 몇 페이지를 넘겨보면 이전 페이지와 다음 페이지는 시작과 다음의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개 방식을 이해하게 되면, 다음 장면은 어떨까 궁금해하며 끝까지 넘겨보게 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단순히 한 가지 패턴만으로 보여주는 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맥락의 시작과 다음, 예를 들면 달걀의 다음 장면은 닭, 다시 닭의 다음 장면은 달걀처럼 순환에 대한 이야기, 새총의 다음 장면은 깨진 유리창처럼 인과관계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하게 생각하는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그런가 하면 김윤이 작가의 『꿈꾸는 동그라미』처럼 그림에 표현된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글 없는 그림책을 즐길 수 있습니다.
『꿈꾸는 동그라미』 김윤이 지음 / 초방책방
이 책은 첫 페이지에 한 문장, 마지막 페이지에 두 문장이 있을 뿐입니다.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그림책도 아니고 『줌, 그림 속의 그림』 『시작 다음 Before After』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첫 번째 페이지를 넘기면 색면 추상화처럼 표현된 그림 속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볼 수 있습니다. 화면은 물속을 연상하게 하는 듯한 푸른색과 물방울 같기도 한 형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서 동그라미는 새싹처럼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화면의 색도 봄에 돋아나는 작은 잎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추상적인 그림들로 이야기를 펼쳐 나가고 있어 처음에는 당혹스러울 수 있지만 그저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마음껏 상상하면 됩니다. 봄의 기운을, 강렬한 여름 태양에 익어가는 과일들을, 냇가에 떠다니는 작은 배를. 이렇게 동그라미는 새싹이 되었다가 과일이 되었다가 작은 배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페이지 어디에서도 그런 것들을 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의 세계를 펼쳐놓은 채 이야기들은 우리의 상상에 맡깁니다.
글이 없다는 공통점을 가진 책들을 보았지만 모두가 다 비슷하지는 않습니다. 글이 있고 없고 뿐 아니라 그림책은 참으로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오늘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서 그림책들을 다시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 아니면 내 책장에 있는 그림책들도 좋고요. 꼭 글 없는 그림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이번에는 그림 속에 있는 재미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에 조금 더 귀 기울이면서 말이죠.
이지현_그림책작가, 『수영장』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7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