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12
연필을 손에 꼭 쥐면 서걱서걱 숲이 생겨나고
색을 입힌 색연필 끝에서는
푸드덕 새들이 날아오릅니다.
사각사각 연필 묘목을 도화지 위에 심고
오늘도 울창한 숲을 되찾는 꿈을 꿉니다.
연필
김혜은 지음 / 44쪽 / 15,000원 / 향
물건들이 어지럽게 올려져 있는 내 책상 위에는 여러 개의 연필꽂이가 있다. 그중 손이 가장 자주 가는 건 연필이다. 연필꽂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볼펜, 칼, 사인펜 등 다양한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그곳의 주인은 연필이다. 그렇다고 연필이 대단하다는 인지는 우리에게 없다. 연필의 귀함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쉽게 쓰고 지울 수 있는 역할과 맞물려 익숙하고 쉬이 구할 수 있음이 아닐까? 다만 그것이 가장 평범하면서 기본적이고 누구나 한 번쯤 써보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내 손가락 사이에서 수많은 노동을 함께하고도 기억되지 않는 평범함이 연필이다.
어린 내 아이가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손에 쥐고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린다. 나는 어떤 연필로 그렸었는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 그림을 그리던 아이의 호기심 가득한 표정과 서투르게 연필을 꼭 잡던 손을 기억한다. 설렘 가득한 어린 신입생의 필통 속 연필은 훗날 시험장에 있는 입시생의 떨림과 창작의 고통을 함께 나눈 벗이기도 하다. 연필은 그렇게 우리의 자람과 함께하고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자기의 몸을 깎아내면서 말이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연필 한 자루는 무엇으로 만들었던가?’ 바로 나무다. 칼 하나를 손에 쥐고 뭉툭하게 닳아버린 연필을 한 손으로 잡고 또 다른 한 손으로 밀어내며 날카롭게 깎아낸다. 연필을 감싸 안은 나무는 맥없이 벗겨져 떨어지고 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것 같다. 연필심을 단단히 에워쌌던 나무는 그 역할이 다함과 동시에 깎여나가 버린다. 그것은 마치 베어진 나무와 같다. 숲의 나무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베어지고 일련의 공정을 거쳐 상품으로 생산된다. 그것은 커다란 집이 될 수도 있고, 작은 연필 한 자루가 될 수도 있다.
『연필』의 그림을 대부분 연필로 그렸다. 연필에 색색깔 옷을 입힌 색연필은 자연의 색을 담기에 아쉬운 듯하지만 오히려 여운을 주어 다른 매력 지점을 만든다. 물을 섞어 농담을 조절하는 먹이나 물감 등과 다르게 손의 힘만으로 조절이 가능하다 보니 흐린 안개의 느낌과 깊은 바다의 느낌도 힘 조절만으로 표현할 수 있다. 힘주어 누르며 그림을 그리면 심이 부러지기도 하는데 섬세한 표현을 위해 뾰족하게 깎아낼 때면 문득 떨어지는 나무들에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나무를 깎아내며 그려낸 나무 그림들, 이 얼마나 모순적인 상황인가. 나무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연필로 나무가 가득 찬 숲을 그리고 그것을 보며 마음의 위안을 받고 치유의 그림이라 말한다. 진짜 나무를 베어 만든 가짜 나무 그림을 가지고 말이다.
서걱서걱, 사각사각 종이에 스치는 작은 마찰음이 좋고 손안에 꼭 쥐어지는 연필의 느낌도 좋다. 오래 쥐고 있으면 찾아오는 통증조차도 ‘내가 무언가를 했구나’ 하는 성취감을 준다. 조금은 평범하고 해묵은 재료임에도 내가 연필을 좋아하는 이유다. 가까이에 있고 쉬이 취할 수 있는 것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 그리고 나는 그것에 어떠한 노력을 하는가라는 물음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글로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나무의 희생을 안다. 몇 번이고 글을 넣으려고 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야기가 되는 글이 없는 그림책인 이유다. 나무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연필은 그 연장선이다. 그림에서 소녀는 연필을 사지만 그 연필로 나무를 그려내고 없어진 숲을 다시 이루게 한다. 작아진 연필조차 나무의 묘목이 되는 것은 그냥 버리지 않고 연필을 심었기에 가능한 결과이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후에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나는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며 아마도 더 많은 연필들이 나의 손을 거쳐 작아지고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무의 희생으로 만든 연필들로 그려진 그림들은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더 많은 나무를 자라나게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수 있길 빌어본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 내가 쓰는 물건들을 생각해보자. 시작이 어디였든 그 쓰임에 의미를 두고 가치와 희생을 생각하고 사용한다면 당신도 숲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김혜은 작가는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연필을 희생하며 입시를 했고,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습니다.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주로 하다 책상 위의 연필, 산책길의 나무, 딸 유하를 주인공으로 첫 그림책 『연필』을 지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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