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들려주는 그림책 이야기 13
바람과 풀벌레 소리로 가득한 들판.
다시 계절들이 쌓여갑니다.
차곡차곡
서선정 글·그림 / 52쪽 / 18,000원 / 시공주니어
『차곡차곡』 그림책은 이렇게 봄의 풍경부터 시작되어 사계절이 흘러갑니다. 『차곡차곡』을 구상하고 처음 만들었던 더미북 속에서는 주인공 여자아이가 하루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집 안과 집 밖으로 나가서 동네 마실을 다녀오고, 그 공간들에서 보고 관찰한 풍경들이 나왔었습니다. 옷장 속의 이불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든가, 시장에서 보았던 계란판들이 차곡차곡 올라가 있다든가. 지금의 책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 구조와 그림들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바라보는 풍경들이 자칫 ‘차곡차곡’의 표면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마는 것 같아서 최종적인 더미북으로 완성하기까지 몇 개월의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에게 미완성된 더미북을 보여줄 기회가 있었습니다. 쭉 보던 동생은 뒤편에 가을 장면이 나오는데 앞에 봄과 여름 장면들도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고, 그날부터 『차곡차곡』의 구성을 재정비했습니다. 사계절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전체 흐름을 구성하기로 정하면서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빈칸들이 메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차곡차곡』의 그림 원화들은 화면 구성이 클로즈업되고 화면 전체 가득 채워진 그림들인지라 한 장 한 장 완성하기까지 물리적인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가장 시간이 오래 걸렸던 그림은 겨울의 개울가 장면입니다. 조약돌 하나하나를 그려 나가다 보니 며칠 부지런을 떨어야 했지만, 돌멩이를 그려 나갈 때마다 점점 더 겨울의 개울가 풍경이 완성되어 가장 재미있게 그린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돌멩이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마음으로 그렸습니다. 무언가가 가득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양새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 덕분인지 그림 원화 작업은 즐겁게 할 수 있었고, 같은 장면을 여러 장 그리는 일 없이 모두 한 장씩 그린 것으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차곡차곡』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우리 이웃들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일상에서 자신의 삶을 부지런히 살고 있습니다. 그저 알아서 잘 자라는 듯 보이는 집안의 화초들도 실은 매일매일 잎사귀를 살펴주고 흙이 마르지는 않았는지, 화분이 비좁지는 않은지 살펴봐주는 누군가의 세심함과 정성으로 잘 자랍니다. 그저 그렇고 똑같은 일상의 반복 같아도 이 모든 계절의 풍경들은 모두가 각자 열심히 자신의 생을 살아내고 있음에 가능한 것이니까요.
이렇게 사계절 동안 조용히 흘러가는 풍경들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우리의 일상들입니다. 기대 밖의 이벤트나 놀라운 사건, 엄청나게 기쁜 소식이 이어지는 그런 특별한 나날들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이 소소한 것들을 많이 사랑합니다.
무심히 흘러가는 하루라는 시간 속에서 순간순간 깨어있다 보면, 무언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차곡차곡』의 영감은 그 순간에 생겨난 것 같습니다. 이 그림책 속의 그림들은 처음과 마지막을 빼곤 모두 가까이 클로즈업된 화면들입니다. 제 시선이 머물렀던 바로 그 시간과 그때의 감정을 담으려 했기 때문이고, 제가 사랑하는 아름다움이 담긴 일상 속 풍경들이 그림책 안에서 쭉 이어지기를 바라던 마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의견들도 많은데, 저는 아이들도 이 책을 보면서 하루하루 자기 생활 속 반짝거리는 순간을 소중히 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지닌 채로 어른이 된다면 자신의 삶 속에서 누구보다 자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요? 행복한 삶은 그것을 얼마나 크게 느끼나보다 얼마나 자주 느끼는지 그 빈도수에 좌우된다는 기사를 본 기억도 납니다.
한 권의 그림책으로 완성되어 몇 번을 다시 보면서 새로이 느끼게 된 것은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풍경, 사물, 그 속에 많은 애정을 품고 있고 자잘하게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앞으로 작업하게 될 그림책들도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이런 자잘함들이 소재가 되고 이야기가 되어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분들의 시간 속에서는 무엇이 차곡차곡 쌓여가는지도 궁금합니다. 시간과 기억, 추억들은 모두 어딘가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삶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고 그렇게 지층처럼 쌓여서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커다란 산이 완성되는 것이라면 다정하고 따뜻하고 감사한 마음들 가득한 단단한 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선정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해왔습니다. 『블루펜드로잉』 『홍콩드로잉』 『나의 서울』 등의 독립출판물을 만들었습니다. 소소한 일상에 애정을 품으며,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지점에서 영감을 받곤 합니다. 오래된 옛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이 취미입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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