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림책 나무에 담긴 기쁨과 슬픔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정병규 지음 / 304쪽 / 18,000원 / 보리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으려던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를 결국 한 번에 다 읽어버렸어요. 월간지 『개똥이네 집』에 2012년 1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정병규 작가가 3년간 우리 그림책작가들을 찾아다니며 연재했던 글 모음인데, 그림책작가 서른일곱 명의 194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지요.
1장은 마치 우리 그림책의 독립투사들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일본에서 나고 자라 우리말과 우리글, 그림도 배운 적이 없지만 겨레의 얼을 가장 잘 표현하는 홍영우, 철저하게 사실에 바탕을 두고 실증적인 그림을 그리는 홍성찬, 슬렁슬렁 허술해보이는 선이지만 견고함 그 자체인 이우경을 비롯해 김용환, 강인춘, 이우범 등의 작가들은 민초들이 힘들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거친 파도 속에서 방세를 내거나 쌀을 살 돈을 벌기 위해 신문사며 잡지사며 학습지 회사에서 일하다 출판 미술계로 넘어오게 된 분들이지요. 그러나 그림에서 느껴지는 구도의 대담함, 익살, 긴장감 등을 보며 이 작은 그림에 온 힘을 다했다는 게 느껴져 숙연해지고, 현대 그림책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돼요.
2장은 뿌리에서 뻗어난 튼튼한 줄기들로, 본격적으로 그림책을 내기 시작한 작가들을 담고 있어요. 글자 없는 그림책에 눈을 뜨게 해준 『노란 우산』의 류재수는 대안 미술교육 활동을 하다가 우리 현실과 역사 문화에 쉽게 다가서려는 노력으로 백두산의 탄생 설화를 장대하고도 강렬한 창작 그림책 『백두산 이야기』로 진화시켰고, 미술 운동 단체에서 일하던 그림 일꾼 권윤덕은 가정을 이룬 뒤 『만희네 집』에 집 한 채를 통째로 담아냈지요. 또한 『달걀 한 개』에서 어릿어릿하고 괜스레 바쁘기만 한 닭을 그렸던 조혜란은 어린 시절 자랐던 마을공동체와 지금 살고 있는 서산을 거울삼아 『할머니, 어디 가요?』 시리즈에서 자잘하지만 중요한 일상의 풍경들을 촘촘하고 현실감 있게 그렸어요.
줄기에서 피어난 꽃에 해당하는 3장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의 다부지고 꼿꼿한 주인공 잎싹이를 만들어낸 김환영은 보령 시골 마을에서 흙을 밟으며 살다가 『강냉이』를 그리기 위해 강원도 홍천의 오두막으로 떠났고 마침내 엄청난 질감이 느껴지는 붉은 흙과 시퍼렇게 자라는 잎들을 그려냈지요. 꿈틀꿈틀 생동감 넘치는 선과 온 힘을 다한 붓질 자국을 보며 생각나는 단어는 바로 ‘투신’이에요. 서울 변두리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어린 소년 이형진은 전래 동화 『여우 누이』를 새로 쓴 『끝지』에서 가족이면서도 원수인 여우 누이 끝지에 대한 애정과 복수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순돌이의 미묘한 심리를 표현해요. 권문희는 『줄줄이 꿴 호랑이』와 『깜박깜박 도깨비』에서 자분자분하면서도 은근히 재치 있는 이야기에 헐렁헐렁 익살맞은 그림을 펼치지요.
우리가 손에 들고 펼쳐볼 수 있는 그림책이란 지면에 저마다 타고난 재능을 고스란히 펼쳐준 작가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지만, 작가 한 명 한 명이 살아낸 이야기를 읽다 보면 기쁨과 슬픔이 뒤섞이고 미안한 마음이 자꾸만 들어요. 독특하고 뛰어난 그림들을 알게 되어 기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보수는 먼 이야기임을 알기에 슬프고, 그러니 미안한 거지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은행가들은 식사를 하며 예술을 논하고, 예술가들은 식사를 하며 돈을 논한다.
이 책에서 만난 이들은 그림책이라는 복제 예술을 하는 분들이지만 극소수 외엔 사정이 다 비슷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이 작가 개개인뿐 아니라 1장 마지막에 ‘한국무지개일러스트회’를 다루었다는 점에 주목해요. 당시 예술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삽화를 그리면서 원고료도 주는 대로 받던(그나마 제대로 주었을까 의심스럽지만) 분들이 힘을 합쳐 그룹 전시도 하고 일러스트레이션이란 분야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출판계에서도 그 위상을 높였으니까요.
저자는 이젠 과거에 속한 이 단체를 다룸으로써 현재 흩어져 활동하는 작가들이 권리를 찾기 위해 해야 할 일과 출판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넌지시 알려준 게 아닐까요? 강렬하고, 벅차고, 아름답고, 재미난 그림책들을 만드는 이들이 돈 걱정을 ‘하지 않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덜’하게 된다면 삶의 뿌리는 더욱 굵게 뻗어날 테고 줄기는 더욱 튼튼해질 테고 꽃은 더욱 활짝 피어날 테니까요.
우리 그림책이라는 나무를 이룬 분들을 찾아 인터뷰하고 작품 세계를 파헤쳐 글로 써낸 정병규 작가. 소명 의식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이 책은 앞으로 한국 그림책의 역사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될 거예요. 한 명 한 명 더 깊이 파고드는 건 그림책 세상에 함께하는 다른 이들의 몫이겠지요?
서남희_번역가, 『그림책과 작가 이야기』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아침독서> 2021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