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우리들의 시간
빨간 잠바를 입은 막두 할매 입가에 미소가 유쾌합니다. 노란 바지를 입은 커피 아집매의 커피 덕분일까요?
“싸게 줄게. 함 보소. 도미 싱싱하다.”
도미보다 더 싱싱한 막두 할매의 목소리는 오늘도 자갈치시장을 가득 채웁니다.
막두
정희선 글·그림 / 40쪽 / 16,000원 / 이야기꽃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로 시작하는 주제가가 유명한 「들장미 소녀 캔디」라는 만화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 캔디는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캐릭터인데 어린 맘에도 꽤 매력적인 캐릭터였습니다. ‘자갈치 아지매’는 어릴 적 캔디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막두』는 전쟁으로 홀로 남겨진 어린 막두가 ‘자갈치시장’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꽤 진부하고, 알지만 듣고 싶지 않은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캐릭터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이 그림책을 구상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부산 수협 공판장을 중심으로 자갈치 아지매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물건은 사지도 않으면서 사진을 찍다보니 싫어하시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엔 도마에 칼을 던지며 불쾌함을 드러내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을 보신 분들이 차츰 자신들의 얼굴도 그려달라고 하면서 조금씩 낯을 익혔습니다.
11월의 칼바람만큼이나 현장은 생각보다 더 거칠고 열악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자갈치 아지매는 너무도 담담했습니다. 정작 그들에게는 씩씩하고 당당하게 견딜 필요가 없는 일상생활이었습니다. 거칠고 억척스러운 삶 속에 감춰진 이야기는 그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남편 사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신다는 아주머니, 잠시 피난 온 후로 어머니와 평생 헤어져 지금도 엄마가 보고 싶다던 할머니, 혹여 자식에게 비린내가 전해질까 가까이하지 못한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자연스레 내 어머니의 삶도 생각났습니다. 그들에게도 사랑받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꿈 많았던 시절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점점 마음이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영도다리에 얽힌 피난민의 사연까지 더해지면서 가장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처음 느꼈던 캐릭터의 힘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막두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나. 행복은커녕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힘겹고 고달픔뿐이었습니다. 작가가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변해 머리로는 밝고 생명력 넘치게 그려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무거운 맘으로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작업의 분위기가 바뀌게 된 계기는 처음 자갈치 아지매가 행복했으면 했던 마음이었습니다. 혹여 그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해도 나는 행복하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어느 스님 말씀처럼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너무 많지만 그럼에도 그 어떤 경우에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미 그분들은 그럴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 자갈치 아지매에게서 받은 느낌이 더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서야 작업이 편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노란 바지를 입은 커피 아줌마에게 장난치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몸에 딱 붙는 알록달록한 바지를 입은 커피 아줌마를 보면서 시작했지만, 이 바지 하나로 생동감 있고 활기찬 이미지를 만들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막두가 처음 자갈치시장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버티는 장면입니다. 전쟁 같은 삶의 현장에서 끝까지 버티는 막두의 뚝심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은 막두가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막두도 꿈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장면을 넣었습니다. 가수 나훈아에게서 느껴지는 구수함과 투박함이 좋았고, 노래 부를 때 표정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노래는 「사랑」이라는 곡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들리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사랑아”를 부른다고 생각하며 감정을 불어넣은 막두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낭만적일 수밖에 없지만 투박하고 거친 막두가 부르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생각하며 행복했던 장면입니다.
막두라는 한 인물을 그려가면서 여러 가지로 버거운 작업이었지만 작업 과정을 거치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여린 아이에서 단단하게 성장한 막두처럼 그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정희선 작가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작가공동체 힐스에서 그림책을 공부했습니다. 따뜻하고 소소한 삶 속에서 행복할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 하는 그림책작가입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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