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독서 Mar 17. 2022

색채 감정이 전하는 그림책 스토리텔링

그림책깊이읽기

회화에서 색의 효과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이다. 사진이 회화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한 19세기에 그들은 사물의 형태를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햇빛이 부서져서 생기는 색채의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아름다운 꽃과 여인, 풍경을 그렸다. 


색에 관한 에바 헬러의 연구는 우리에게 색이 인간의 감성에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독일 전역에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2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 한 결과인 『색의 유혹』이라는 책으로 인간과 색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즉 색과 감정의 관계는 우연이나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일생 동안 쌓아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파랑을 차갑게 느끼는 이유는 추울 때 파랗게 변하는 피부와 입술 등 우리의 경험에 근거한다고 한다. 붉은색은 ‘피’와 ‘불’이라는 근본적인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평화를 상징하는 녹색은 나뭇잎의 색과 관련이 있다. 흰색과 검정색은 색의 부재를 나타내므로 죽은 자를 애도하는 사람들의 상복에 사용된다. 


색채론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분류에 따르면 일차색은 빨강, 노랑, 파랑이며 이차색은 녹색, 주황, 보라다. 분홍, 회색, 갈색은 혼합색으로 이차색의 아래 단계이다. 검정과 흰색은 색인지 아닌지가 아직 논란 중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색으로 인정된다. 한 가지 색을 분류할 때 가장 자주 사용되는 기준은 명도와 채도다. 명도는 색의 밝기와 어두움의 정도로, 명도가 가장 높은 색은 흰색이고 가장 어두운 색은 검은색이다. 채도는 색의 맑음 정도, 즉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를 가리키는 강도이다. 어떤 색에 흰색이 배합되면 명도는 높아지지만 채도는 낮아진다. 명도가 높으면 밝고 행복한 분위기를, 낮으면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채도가 높으면 활달하고 낮으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에바 헬러의 연구가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감정은 색보다 훨씬 다양하므로 같은 색이라도 다양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때로는 상충된 영향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색은 어떤 색과 어울리는가에 따라 매우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색은 한 종류의 감정에만 관련된 건 아니다. 이러한 색과 인간 감성 사이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그림책이다. 그림책의 스토리텔링은 여러 장면과 화면에 그려진 그림과 글의 어우러짐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색은 작품의 의미와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림책 색채로 전하는 감정 이야기 

어린이 그림책작가들은 대체로 다양한 색을 활용해 밝고 활기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선호하는 듯하다. 에릭 칼의 『배고픈 애벌레』는 명도와 채도가 아주 높은 원색들을 사용해 명랑하며 활발한 느낌을 준다. 레오 리오니의 『물고기는 물고기야!』에서는 육지로 나간 개구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물고기가 자기식대로 육지의 사람과 동물들을 상상하는 장면을 아름답게 꾸며내어 색이 주는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도널드 크루스가 그린 『화물 열차』의 화물칸에 채색된 빨강, 노랑, 파랑, 주황, 초록, 보라는 달리는 화물열차에 경쾌함을 더한다.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작품들은 대체로 명도가 높은 색을 사용한다. 베라 B. 윌리엄스가 그린 『엄마의 의자』의 주조색은 노랑과 빨강이다. 앞표지에 그려진 의자와 표지 테두리의 빨간 색조, 앞뒤 면지의 노랑은 밝고 행복한 느낌을 갖게 한다. 빨간색의 안락의자는 하루의 고된 일을 마치고 귀가한 어머니를 위해 식구들이 동전을 모아 구입한 것으로 가족의 훈훈한 사랑을 표현한다. 

애니타 로벨이 그린 『안나의 빨간 외투』에서 외투의 색은 매우 순도 높은 빨강이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겨울이 다가오지만 안나의 파란 외투는 더 이상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서 새 외투가 필요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물품은 물론 음식도 바닥이 난 상황에서 외투를 마련한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안나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물품들을 안나의 외투를 위해 내어놓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농부로부터 양털을 구하고, 안나와 함께 그 털을 산딸기즙으로 빨갛게 염색하고, 물레질하는 할머니에게 천을 짜달라 하고, 재단사 아저씨에게 그 천을 재단해 달라고 해 안나에게 맞는 멋진 빨간색 외투가 완성된다. 빨강은 앞표지와 양털을 염색한 사건 이후부터 마지막 면지까지 줄곧 사용되어 작품 전체를 따뜻한 분위기로 채운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아 빨간 외투를 입고 외투를 만들어준 이웃들과 양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안나의 얼굴은 행복감에 빛난다. 


ⓒ비룡소(『안나의 빨간 외투』)


반면 채도가 낮은 작품으로는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을 예로 들 수 있다. 존이 학교로 가는 길은 항상 짙은 안개로 덮여있어 사물의 윤곽선은 흐릿하다. 색채감이 거의 없는 이러한 분위기는 존에게 매일 일어나는, 백일몽과 같은 이상한 사건들을 설명한다. 바버러 쿠니가 그린 『바구니 달』은 백여 년 전, 미국 허드슨의 산골에서 바구니를 짜 생계를 이어갔던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낮은 채도의 갈색, 녹색, 붉은색은 숲속 바람과 대화하는 산골 사람들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 


명도와 채도, 색 대비를 활용하는 연출 

그림책에서 검정이나 회색, 흰색과 같은 무채색은 진지함과 때로는 입체감을 연출하는 데 효과적이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는 연필만으로 단색 계열의 풍부하고 깊이 있는 그림을 보여준다. 『압둘 가사지의 정원』은 압둘 가사지라는 신비한 인물의 정원에서 벌어지는 마술 같은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압둘 가사지의 정원으로 가는 문의 양편에 서있는 조각상의 몸짓은 주인공 소년에게 위험을 암시한다. 


한 작품에서 명도대비는 극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뉴욕의 밤거리가 주 배경인 『페페, 가로등을 켜는 아이』의 주조색은 검은색이다. 이탈리아에서 뉴욕으로 갓 이민 온 가족이 사는 집의 실내는 어둡고 낮은 명도의 색으로 채색되어 궁핍하고 우울한 가정의 분위기를 전달한다. 그 가정의 유일한 아들인 페페는 돈을 벌기 위해 밤거리의 가로등을 켜는 일을 맡게 되지만 페페의 아버지는 그가 하는 일이 못마땅하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여동생과 페페의 얼굴을 환히 비추는 가로등 불빛은 밤거리의 어두움과 대비되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열린어린이(『페페, 가로등을 켜는 아이』)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가 사용하는 검정은 가장 검다고 하는 벨벳 검정이다. 검정과 함께 사용된 높은 명도와 채도의 색채로 인해 『예수님 이야기』 『모세 이야기』의 배경은 화려하고 웅장한 그랜드 오페라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검은색은 클레먼트 허드가 그린 『잘 자요, 달님』에서도 사용되었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커튼 사이를 통해 그려진, 별이 빛나는 어두운 밤이지만 침실은 밝은 벽지와 바닥으로 채색되어 안온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전한다. 침대에 누운 아기 토끼는 주위 모든 것에게 취침 인사를 하고 평안하게 잠든다. 


유채색들 간의 대비는 주인공 심리묘사에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파랑은 차가운 색이며 빨강 옆에서 그 느낌은 더 부각된다.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는 파랑과 빨강의 대비를 통해 주인공의 내면세계와 그 변화를 잘 표현한다. 한나와 아버지가 아침 식사를 하는 첫 장면에서 신문을 펼쳐 든 아버지의 양복과 부엌의 가구와 타일 벽과 바닥, 식기와 시리얼 상자는 파란 계열이다. 반면 독자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앉아있는 한나는 빨간 스웨터 차림이다. 이 장면을 통해 독자들은 아버지와 한나 간에 물리적·심리적으로 깊은 간격이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반면 마지막 장면에서 한나와 같이 빨간 스웨터를 입은 아버지는 한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한나가 보는 사진을 보고 있다. 이제 그들은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우울과 공포를 대변하는 색과 효과 

마지막으로 어린이책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색을 든다면 청록색이나 회청색, 갈색, 회색, 보라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파랑 자체는 서늘하고 조용한 느낌을 주지만 초록, 보라와 배합되면 무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이상한 화요일』은 어떤 마을에서 화요일 저녁 8시만 되면 벌어지는 음산하고 불쾌하며 초자연적인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의 주조가 되는 청록색은 공포 영화의 분위기를 떠오르게 한다. 그 전날 밤에 벌어진 사건을 수사하러 온 경찰들의 난감한 표정으로 종료된 것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그다음 장에 같은 요일, 같은 시각에 돼지들이 공중 부양하는 모습으로 이어지면서 긴 여운을 남긴다.


갈색은 헬러의 연구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색으로 보고되었다. 그리고 회색은 무정함, 무관심, 잔혹함과 관련이 있다. 독일어에서 공포나 전율을 뜻하는 말인 ‘그라운(Grauen)’은 회색 ‘그라우(grau)’와 매우 유사하다. 존 클라센은 그의 일련의 작품인 모자 3부작 『내 모자는 어디 갔을까?』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 『모자를 보았어』의 주조색으로 회색과 갈색을 사용해 어린이책에서 드문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내 모자는 어디 갔을까?』의 배경에는 들판에 듬성듬성 자라난 녹갈색의 풀과 잿빛의 바위와 돌멩이가 그려져 있고 주인공인 큰곰은 갈색 계열이다. 이 작품의 그림에서 부각되는 것은 토끼가 쓴 (곰이 찾던) 빨간 모자다.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의 무대는 물풀이 우거진 어두운 바닷속이며 모자를 훔쳐간 작은 물고기를 뒤쫓는, 모자의 원 주인인 회갈색의 물고기는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그려져 있다. 

ⓒ시공주니어(『모자를 보았어』)

『모자를 보았어』의 배경은 잿빛 사막과 큰 선인장과 바위이며 주인공인 두 거북이의 몸은 회갈색이다. 3부작의 주조색인 잿빛과 갈색은 단조롭고 우울하고 황량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인물들의 심리 상태는 눈빛, 즉 눈의 흰자위와 검은 눈동자가 이루는 명암의 대조로 보여준다. 3부작에서 사용된 색들은 모자 도둑을 쫓거나, 모자 한 개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등 긴장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상으로 색이 그림책 스토리텔링에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았다. 색이 인간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과 역사적 전통을 아는 것은 어린이 그림책에 관심이 있는 어른들에게 매우 유용하다. 왜냐하면 색에 대한 지식은 그들이 그림책을 깊이 있게 읽고 묘사하고 비평할 수 있는 지적 자원을 제공하며 따라서 어린이가 유능한 독자가 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현은자_성균관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8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작가의 이전글 즐겁고 어려운 나의 그림책 번역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