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독서 Mar 29. 2022

건축 요소로 짓는 그림책

그림책깊이읽기

11년 전 여름, 나는 스위스의 어느 밀밭을 걷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축가 렌초 피아노의 건축물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들 사이로 완만하게 솟아난 세 개의 언덕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언덕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덕이 아니라 마치 언덕처럼 물결치는 세 동의 건물이었다.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파울 클레 미술관’에 도착한 것이다. 건축가는 이 건물이 땅처럼 보이길 원했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땅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소담하게 솟아나 물결치는 세 공간들은 화가, 음악가, 교육자로 살아온 파울 클레의 세 삶을 우아하고 시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파울 클레 미술관을 가면서도 파울 클레가 누군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미술관을 다 둘러보고 난 뒤에는 파울 클레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건축이 가진 힘, 공간을 걷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힘을 그때 절실히 느꼈다.


건축으로 그림책 하기

“건축을 전공했는데 왜 그림책작가가 되었나요?” 

작가가 된 이후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다. 강연을 가든 인터뷰를 하든 어느 행사에 참여해도 꼭 한 번 이상은 듣게 된다. 자주 듣는 질문이기에 대답도 늘 마련되어 있다. 

“건축을 전공했기에 그림책작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벽』의 모티브가 된 프랑스 롱샹 성당


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을 건축을 통해 배웠다. 좋은 건축은 이야기를 한다. 심지어 건축물의 설계도도 그 속에 살아갈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좋은 건축이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 흔적을 가득 안은 건축물은 자연스레 이야기가 밴다. 그림책 『벽』은 여행 중 만난 한 성당에서 영감을 얻었다. 안에 뚫린 창문 크기와 밖에 뚫린 창문 크기를 다르게 함으로써 안과 밖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꾼 놀라운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그 성당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벽을 통해 자신의 삶을 통찰하길, 신앙과 세계관에 대한 시선마저도 바꾸길 바랐던 것 같다. 이게 이야기가 아니면 무엇일까? 거리에 나가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뽐내는 거대한 책들이 곳곳에 서있다.


도면의 시선과 구도 이용한 장치들

건축을 공부하며 내가 처음으로 그린 도면은 평면도다. 공간의 크기와 배치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건축 교육이 평면에서 시작된다. 『위를 봐요!』는 바로 이 평면도의 시선을 이용해서 만든 책이다. 인간은 하늘을 날지 못하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 책의 구도는 일반적인 시선으론 굉장히 낯설다. 매일 평면도를 다루는 건축가들이 아니고서야 이 낯선 풍경에 익숙해지긴 쉽지 않다. 이 낯선 풍경에 던져진 아이가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현암주니어(『위를 봐요!』)

평면을 다룰 수 있게 되면 그다음 단계는 단면이다. 단면도는 공간의 깊이와 수직적인 동선에 대한 도면이다. 평면의 한 지점을 잘라내어 그 면을 바로 세운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평면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제대로 그릴 수 없다. 건축을 공부하며 두 번째로 익혔던 단면의 시선과 구도로 만든 그림책이 바로 『별과 나』다. 이 그림책은 글 없이 별과 사람의 관계만으로 구성된다. 단면의 시선으로 땅과 사람의 옆모습이 함께 움직이며 진행된다. 하늘의 별과 땅에 있는 사람의 관계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 단면도였기 때문에 선택한 구도였다. 책의 중요한 주제인 ‘빛’ 또한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인공적으로 만든 닫힌 세계인 건축 공간은 어둡다. 그 어둠에 어떻게 빛을 부여할지가 중세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를 이어 근대건축으로 이어지는 건축사의 한 축이다.

ⓒ비룡소(『별과 나』)

평면도와 단면도 말고도 건축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 있다. 바로 입체적인 투시도법으로 건물을 그리는 거다. 도면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모형과 입체적인 그림, 그래픽으로 자신의 건물을 미리 만들어본다. 이 입체적인 시선과 구도로 만들어진 그림책이 『벽』이다. 책 속에는 지우지 않은 몇몇 점선들이 남아있다. 투시도법을 그릴 때 사용한 보조선들을 일부러 남겨둔 것이다. 

ⓒ비룡소(『벽』)

내가 건축 교육을 통해 배웠던 방식으로 책을 만들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자, 건축적으로 이어진 세 권의 연결성을 강조하려고 남겨둔 장치다. ‘『위를 봐요!』(2014), 『별과 나』(2017), 『벽』(2016)’은 내 나름대로 건축과 그림책의 관계성을 정립한 세 권의 시리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도 아니고 만들어진 순서대로 나오지도 않았지만 세 권은 ‘건축 3부작’으로 묶을 수 있다. 건축의 소재와 구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이용한 책들이다.


리듬감과 균형, 전체와 부분의 관계성

굳이 건축적인 소재와 구도를 다루지 않더라도 그림책은 그 자체가 이미 건축과 유사한 점이 많다. 건축물은 한정된 크기의 땅 위에 지어지므로 건축가에게는 땅의 크기나 모양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림책도 책의 판형이 곧 책의 이야기나 주제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림책작가들은 책의 크기를 신중히 고른다. 그림책의 판형은 곧 건축가에게 주어진 땅과 같다.


건축은 공간을 만드는 기둥, 지붕, 벽, 바닥, 계단 등 건축 요소들 간의 관계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창문을 내고 자리가 남는다고 계단을 넣는 게 아니라 그 요소들 간의 관계, 리듬감, 균형 등을 고려해서 도면을 그리고 배치한다. 그림책도 그림과 텍스트 간의 관계와 리듬감이 굉장히 중요하다. 빈자리가 있다고 글을 배치하거나 책에 여백이 많다고 큰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결국 전하려는 이야기(공간)를 위해서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 간의 관계성을 고려하게 된다.


그림책이 다른 장르의 책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책의 물질적인 구조와 꼴도 그림책의 일부로 수용한다는 점이다. 어느 크기의 종이에 실릴지 고려하면서 소설을 쓸까? 어떤 재질의 종이에 인쇄될지 생각하며 시를 적을까? 그림책은 그렇게 한다. 종이의 크기와 재질, 종이를 묶는 제본의 방식과 커버의 두께, 책의 중앙에 생기는 굴곡의 모양까지도 세심하게 고려해서 그림을 그리고 배치해 책을 만든다. 이것이 그림책을 독립적인 장르로 인정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나는 확신한다. 건축도 건물의 형태뿐 아니라 재질, 건물을 만들어가는 방법, 요소들을 맞붙게 만드는 방식까지도 고려한다. 안뿐 아니라 겉을 만드는 방법과 순서까지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 그림책과 건축의 공통점이다. 전체와 부분에 대한 총체적인 안목과 인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장르들이다.


그림책에 담는 다양한 공간들

건축이 그림책이 될 수 있다면, 그림책도 건축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건축물 안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살다 그곳에서 죽는다. 현대인의 삶은 이미 건축물과 동떨어질 수 없다. 일할 때도 공부할 때도 쉬고 놀 때도 우리는 공간 안에서 한다. 나는 그림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다양한 건축 경험을 전달하고 싶다. 한국에도 이미 훌륭한 건축물들이 많이 있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공간에서 살지 않는다. 다양한 형태의 공간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생각의 형태나 깊이도 그만큼 다양해진다. 현실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주거 공간을 제공할 수 없다면 책을 통해서나마 다양한 모습의 공간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내 책에 계단과 난간, 벽이나 창문처럼 건축의 요소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콜라(『3초 다이빙』)

『3초 다이빙』의 배경은 다이빙대다. 보통 다이빙대보다 훨씬 길고 복잡한 구조다. 거기서 주인공이 가진 생각과 건축의 모습은 서로 닮아있다. 수학을 싫어하는 장면에선 나누기와 숫자의 모습을 가진 벽과 난간을, 태권도 사범이 발차기하는 장면에선 발차기를 하듯 엇갈리며 배치한 계단의 모습을 그렸다. 이 책은 정말 그림책으로 건축물을 만드는 심정으로 그렸다.


‘건축으로 그림책 하기, 그림책으로 건축하기’라는 문장으로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할 수 있겠다. 오늘도 행복하게 그림책 속에 집을 지으며 집들에서 그림책들을 읽으며 살아간다.


정진호_그림책작가, 『벽』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8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작가의 이전글 아빠의 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