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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Mar 28. 2022

아빠의 밭

흙을 일구듯 담은 자연의 시간

아빠는 처음으로 마주한다. 
작은 씨앗이 커다란 열매가 되는 신비로움을,
붉고 달콤하게 익히는 바람의 온도를,
조금씩 모두 다른 흙의 색깔을,
고단함을 잊게 하는 수확의 기쁨을.



아빠의 밭 

전소영 글·그림 / 40쪽 / 16,000원 / 달그림



얼마 전 시골로 이사를 온 뒤 산책을 나갈 때마다 논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을 자주 봅니다. 대부분 구부정한 자세로 땅에 바짝 붙어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철마다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부지런히 논밭을 매만집니다. 물론 생업으로 삼으면 무척 고단하겠지만 요즈음 도시인들 사이에서도 작은 땅이라도 일구어 내 손으로 밭을 가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고 듣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흙으로 이끄는 것일까요?


『아빠의 밭』은 평생 농사일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던 ‘도시인’ 아빠가 퇴직하신 뒤 스스로 흙을 찾아 일구는 이야기입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물려주신 땅과 농기구로 해마다 조금씩 시행착오를 겪고 어깨너머로 배우며 농작물을 늘려갑니다. 많은 사람과 부딪치며 치열하게 살아온 ‘어른’인 아빠도 땅 앞에 서면 배울 것이 끝이 없습니다. 아빠는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가족들에게 더 맛있는 과일을 사다주기 위해, 자신의 명예와 성공을 위해, 젊은 날의 열정과 패기로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언제까지나 탄탄대로일 줄 알았던 인생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무상함을 느끼고 허탈해집니다. 그것이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을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밭에서 하는 일은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여태껏 믿어왔던 삶의 목적과 의미와는 다른 일입니다. 아빠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경험하며 마음이 건강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연이 주는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봅니다. 흙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품어 기르고 우리를 먹여 살립니다. 인간이 버리는 것들조차 정화해 내보냅니다. 그렇게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이며 모든 생명의 안식처이자 삶의 터전입니다. 농사일은 그런 흙 가까이에서 하는 육체노동을 통한 단순하며 정직한 일입니다. 씨앗을 뿌려 물을 주는 일, 밭을 갈고 거름을 주는 일들에 정성을 들이며 고요함의 가운데 있게 됩니다.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며 감사함의 노래를 부르게 되고 태풍이라도 오면 그저 큰 피해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밭일은 사람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에 계절의 흐름에 속도를 맞추며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오감을 열어 바람 온도와 흙의 색깔까지도 느껴야 하지요. 그렇게 아빠는 자연과 동화되어 갑니다. 저는 그것을 “한해가 잘되면, 한해는 안 된다” “흙 내음을 맡으면 배고픈 줄도 모르고 일을 한다” “봄이 되면, 겨우내 단단해진 흙이 숨을 쉴 수 있게 갈아줘야 한다”라는 아빠의 말들 속에서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고,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빠는 밭일을 하고 저는 그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기록했습니다. 아빠가 밭을 일구듯이 저는 그림을 일구었습니다. 실제로 밭에 가보면 온갖 작물들의 모양과 색깔, 바람에 실려 오는 흙 내음, 여러 가지 농기구 등 볼 것과 느낄 것이 많은데 막상 그림으로 옮기려니 자칫 지루해질 것 같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스냅사진이 겹쳐져 있는 것 같은 여러 가지 크기의 ‘칸’이었는데, 이것으로 화면에 리듬감을 주고 전체적인 흐름을 연결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 칸들은 마치 누군가 모아놓은 앨범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와 같은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흙을 표현하는 데에는 밀도와 거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과슈(불투명 수채화)를 사용했고, 다양한 색감과 느낌을 담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빠의 밭』은 그렇게 흙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처음과 끝도 흙으로 열고 닫습니다. 어쩌면 저는 여기에 자연의 숭고함과 경이로움,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겸손함을 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비단 아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땅을 밟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느 생태학자는 자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중의 하나는 ‘밭을 일구는 일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언젠가는 저도 진짜 흙에서 제 밭을 일구는 날을 그려봅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우리 식구가 먹을 양만큼만 심어 그 핑계로 부지런 떨어보고, 곁에서 그림으로 담아 보기도 하고. 수확한 것들 나누면서 기쁨으로 가득 차는 날들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전소영 작가는 어릴 적부터 줄곧 그림을 그려왔고,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습니다. 자연과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 얼마 전에 문산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연남천 풀다발』 『적당한 거리』 『아빠의 밭』을 쓰고 그렸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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