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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Apr 15. 2022

시인 아저씨, 국수 드세요

시 그림책으로 건네는 백석의 국수 한 그릇

시인 아저씨, 국수 드세요

신순재 글 / 오승민 그림 / 40쪽 / 15,000원 / 천개의바람



이 그림책은 백석의 시 「국수」를 모티브로 만든 책이에요. 백석의 시에는 백여 가지가 넘는 음식들이 나오는데, 백석이 어린 시절 먹었던 평범하고 소박한 음식들이지요. 국수는 그중에서도 백석이 가장 좋아한 음식이었어요. 「국수」에는 한밤중에 국수를 만들어 온 가족이 뜨끈한 아랫목에 앉아서 나눠먹는 소박하면서도 행복한 하룻밤이 묘사되어 있어요.


백석이 이 시를 쓴 건 1941년인데, 당시 백석은 현실에 절망하여 변방을 떠돌다가 쫓기듯이 낯선 만주 땅에 가 있었다고 해요. 춥고 외로운 겨울밤, 한 젊은이가 고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 시를 쓴 것이지요. 이 시가 그려내는 평범하고도 소박한 하룻밤이 백석에게는 얼마나 그립고 지켜내고 싶었던 세계였을까 가슴이 아팠어요. 할 수만 있다면 지치고 외로운 이 젊은이를 데려다가 그렇게 좋아하던 국수를 한 그릇 먹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는 백석이 사랑해서 시에도 자주 등장시켰던 사람들과 동물들이 찾아와서 같이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이 그림책은 그런 마음으로 시작되었어요.


깊은 산속에 있는 외딴집, 한밤중에 아이는 잠이 깨요. 엄마를 찾아 마당으로 나오니 사방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고, 부엌에선 빛이 새어나와요. 문을 열어보니 엄마가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있어요. 바로 그때 하얀 눈을 뒤집어쓴 장사꾼들이 집안으로 들어서요. 그렇게 한밤중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추워 언 몸을 녹일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아이 집으로 찾아오지요.

자는 모습이 호랑이 같고 곰 같고 소 같은 장사꾼들, 무리지어 찾아오는 친척들, 흰 당나귀와 나타샤, 승냥이, 여우, 멧돼지, 그리고 가즈랑집 할머니까지. 이 그림책에서 산골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동물들은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에요. 그림책 문장 속에 백석의 시에 나오는 표현들도 숨겨두었어요. 승냥이만한 우리 집 개, 응앙응앙 당나귀가 운다 등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백석의 시를 느껴보고, 또 이 표현들이 나오는 시가 궁금해서 찾아보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요.

국수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 중에 가즈랑집 할머니는 「가즈랑집」이란 시의 주인공이에요. 깊은 산속에서 예순이 넘은 나이에 혼자 살고, 멧돼지와 승냥이와 여우와 이웃으로 사는 강인한 존재지요. 간밤에 섬돌에 승냥이가 왔다갔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긴 담뱃대에 독한 담뱃잎을 넣고 연거푸 피워대는 가즈랑집 할머니가 저는 신화 속에 나오는 마고할미 같았어요. 「나와 지렝이」에 나오는 구렁이만한 지렁이를 함께 등장시킨 것도 마고할미처럼 의연하고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어서예요. 저는 백석의 시에서 흥성한 판타지 세계를 보았어요. 단지 풍속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유년보다 더 먼 시원을 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산골 외딴집을 뒤덮은 흰 눈은, 이 작은 집을 환상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주지요. 오승민 작가는 물감을 여러 겹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목화솜처럼 따뜻한 느낌을 주는 눈 세상을 만들어냈지요. 그렇게 한밤중 국수 삶는 물을 끓이는 연기가 흰 눈과 함께 산골 외딴 집을 따듯한 온기로 감싸주고, 그 온기를 나침반 삼아 춥고 외롭고 지친 젊은이가 먼 데서부터 찾아오지요. 그리고 모두가 젊은이를 에워싸고 메아리처럼 외쳐요. “시인 아저씨, 국수 드세요!”

시인이 받아든 국수는 동치미 국물에 만 쨍하게 차가운 국수였어요. 백석의 고향인 평안도에서 겨울철 즐겨먹던 음식이라지요. 시인이 차디찬 국수를 먹는 장면이 따뜻하고 온화하게 느껴지는 것은, 쩔쩔 끓는 아랫목을 내어주고 한입 들이켤 때까지 가만히 지켜봐주는 존재들의 온기 때문이겠지요. 시인이 국수를 먹고 내뱉은 한마디, “아!” 하는 감탄사는 그 온기에 대한 대답일 거예요.


백석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라져도, 우리가 국수의 맛과 냄새 속에 담겨있는 소중한 것을 기억하고, 국수를 나눠먹는 일상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한, 그 속에 담긴 소중한 것들도 이어지리라는 바람을 시에 담았어요. 백석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이 그림책을 보면서, 지치고 외로운 젊은이가, 또 어려운 시대를 견디며 살아온 많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사람들 곁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는 모습을 안쓰럽게, 또 즐겁게 보아주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지켜내고 싶은 하룻밤이 있을 거예요. 이 그림책을 통해 저마다의 소중한 하룻밤을 떠올려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모두의 소중한 것들이 국수 가락처럼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신순재_『시인 아저씨, 국수 드세요』 글작가


이 콘텐츠는 <월간아침독서> 2022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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